한글대장경 제82권

편양당집(鞭羊堂集) 제二권

oṃ maṇi padme hūṃ 2026. 3. 8. 23:15

 편양당집(鞭羊堂集) 제二권

 

 언기(彦機) 지음

 

 보개산 영은사 신창기(寶盖山靈隱寺新創記)

 

 영은사는 국일등계(國一燈階) 문하(門下)의 담언(曇彦) 노사(老師)의 손제자(孫弟子)인 성일(性一)이 세운 것이다.

 노사는 등계를 좇아 여러 해를 놀았다. 그 도를 전해 받아 세상을 교화할 때, 선등(禪燈)으로써 용을 붙잡고 봉을 치는 [1]기지(機指)를 바로 주어, 그로 하여금 깊은 산에 들어가 높은 산봉우리에 앉아서는 솔꽃을 먹고 곡식을 물리치다가, 마침내 무쇠소가 소리치면서 큰 강으로 들어가는 징조를 보았다.

 , 미타참(彌陀懺)과 十六관()을 그물로 삼아 생사 바다 속의 말라빠진 고기를 건져 서방(西方) 백련지(白蓮池) 언덕에 갖다 두었다.

 황해도 이남과 경기도 이서에서 노사의 입의 강의와 [2]손가락의 가르침을 받아 거사(居士)가 된 사람들은 다 볼만한 법도(法度)가 있었으니, 한 스승이 뒤를 이어받고 종()을 이루어 책임을 다하되 게으르지 않았으니, 그 할 말을 말하고 행할 일을 행하여 대중의 귀의처(歸依處)가 되었던 것이다.

 노사가 세상을 떠나자 일찌기 그의 교화를 받은 사람들이 노사의 은덕을 갚기를 꾀하였다. 그리하여 성일 스님에게 가서,

 『선사(先師)께서 우리들에게 은혜를 베푼 것은 매우 크다. 그러므로 그를 사모하여 잊지 못하는 것은 나나 스님이 같을 것이다. 스님이 선사를 위해 산수 좋은 곳에 보전(寶殿)을 세워, 앉아서 우리를 가르치고, 또 후세 사람이 이 소문을 듣고 선()을 행하려 한다면, 그야말로 그것은 선사의 은덕을 갚고 그 자취를 빛내는 것이 될 것이다.

하였더니, 성일 스님은

 『우리가 스승을 스승으로 받들어 그 아름다움을 영구히 계승하려는 그것이 첫째의 할 일이요, 또 갈림길에 있는 이를 가엾이 여겨 그 잃은 염소를 가리켜 주려 한다면 그것이 둘째의 할 일이다. 내가 이 두 가지 책임을 진 것도 그러하거늘 어찌 감히 그대 청을 돌아보지 않겠는가.

하였다. 그리하여 성일 스님이 예환(鯢桓)의 연못에서 일어나 지리를 살피다가 보개산 영은사의 옛터를 찾어내어 재물을 모우고 목수와 석공을 불러 림목을 베니 먼산이 열리고 덩굴을 잘으니 옛 섬뜰이 나왔다.

 삼태기와 괭이를 가?다가 흙을 파내고 위에는 법당 五간()을 세우고, 다음은 사문(沙門) 一간을 세우며, 별도로 전내(殿內)중앙에 조각하는 이를 시켜 공교하게 나무로 적은 보각(寶閣) 하나를 다듬어 금은으로 꾸미고 당번(幢幡)을 달고 연화대를 마련하여 석가세존의 존상(尊像)을 안치하였다.

 그다음 기와를 덮고, 또 그다음 단청을 하고, 또 그다음 벽을 바르고, 또 그 다음에는 안으로 종 · 경쇠 · 법북 · 요발(鐃鈸) 따위와 밖으로 온갖 생활기구를 모두 갖추어 모자람이 없었다.

 산중의 절이 三十여 채가 있는데 영은사보다 먼저 된 것은 옛날에 이루어진 것이요, 영은사보다 뒤에 된 것은 새로  이루어진 것이다. 마룻대와 기둥과 들보와 서까래며, 기와와 벽돌이며, ()과 백()이며, 기구들이며, 나아가서는 아름다운 나무와 상서로운 풀과 기이한 꽃과 괴이한 돌 등이 모두 가지를 뻗고 맵시를 드러내어 다 그 안에 있었다.

 영은사에 앉아 사방을 둘러보면 빼어난 산봉우리의 형세가 높은 것과 높고 낮은 것이며, 먼 것과 멀고 가까운 것이며, 좌우와 전후에 가까이 있되 제각기 모두 마땅하여 하나도 빠짐이 없었다. 또 뜰은 넓고 평평하고, 보전(寶殿)은 크고 넓어 운수(雲水)의 총림(叢林)으로서 영은사만큼 웅대한 것이 없었다.

 성일 스님을 도와 이 절을 이룸에 있어서 네 사람이 있으니 덕인(德仁), 학린(學憐), 대능(大能), 담연(湛演)이다.

 법다잉며 단() 위의 소각(小閣)이며 주방()이며 고루(庫樓)며 정문(正門)이며 기와며 단청(丹靑) 등은 성일이 한 것이요, 연화? (蓮花座)며 불상(佛像) 등은 대능이 한 것이며, 도배는 담연이 한 것이다.

 덕인은 성일의 스승이요, 학련은 성일의 아우요, 대능과 담연과 소경(昭景)과 성일은 동갑이다.

 성일은 지혜를 쓴 사람이요, 학련은 힘을 쓴 사람이며, 덕인은 그 두 가지를 다 쓴 사람이다. 이 五인은 그 사업이 비록 다르나 공을 이루는데 있어서는 다 같은 것이다. 젊어서 많은 지혜를 일으키고 힘을 일으키지마는, 다같이 지혜의 바다로 돌아가면 누가 [3]강한(江漢)을 구별하겠으며, 누가 그 깊고 얕음을 분별하겠는가?

 내가 과객으로 여러 해 동안 영은사에 우거(寓居)할 때, 성일이 종이와 붓으로 내게 물었다.

 『내 듣건대 당신은 나와 동갑이요, 또 오랫동안 국일(國一) 스님을 섬겼다 합니다. 그렇다면 나도 국일 스님의 후예인데 당신은 왜 한 길 가는 사람으로서 나를 대합니까? 당신은 우리들의 일을 글로 적어 주어야 합니다.

 나는 말하였다.

 『스님은 앉으십시오. 나는 말하리라. 단주(丹朱)와 상균(尙均)이 어찌 다 성인(聖人)의 아들이 아니겠읍니까? 그러나 그들은 재지(才智)가 모자라 두 아버지의 도를 전해 가지지 못하였읍니다. 더구나 나는 그 두 아들보다 못하지 않습니까?

 나는 사람된 성품이 소직(素直)하여 밑의 사람을 낚을 권세가 없고 위의 사람을 사귈 도가 없으매, 위아랫 사람들이 다 [4]묵뇨(墨尿)처럼 피해 달아났으므로 다만 혼자 슬퍼하였으며, 폐오()도 또한 다 쫓아 내었읍니다. 나는 여러 무리의 스승인 국일에 미치지 못하는데 어찌 감히 말할 수 있겠읍니까. 아아, 스님, 스님은 지금 내게 말했읍니다. 이 공사의 내력과 스님과 사옹(師翁)의 화문(化門)의 사적은 스님 말씀대로 기록할 수 있지마는, 스님이 만일 낚시를 거두고 청산에 돌아가 「고함치는 무쇠소」의 글귀를 깨친다면 그것은 나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만력(萬曆) 四十七년 기미년 봄에 시작하여 천계(天啓) 五년 을축년 가을에 마치다.

 

 묘향산 빈발암기(妙香山鉢庵記)

 

 부처의 마음은 공()으로 집착을 교화하나니 그것은 지()의 교화요, 복리(福利)로 탐욕을 교화하나니 그것은 인()의 교화이며, 연업(緣業)으로 망()을 교화하나니 그것은 술()의 교화이다.

 그러므로 중하(中下)의 근기는 그 말을 들으면 놀라고 두려워하며 믿고 좇는다. 이른바 물에 빠진 사람은 손으로 구제하고, 불에 타는 사람은 물로 구제하나니, 사람을 살리는 그 은혜는 실로 크다 하겠다.

 영주(寧州)의 향악(香岳)에 빙발(氷鉢)이라는 청정한 가람(伽藍)이 있는데 지은 지가 오래 되어 안팎이 모두 무너졌으므로 거의 앉아 참선할 수 없었다. 마침 성천 법사(性天法師)가 그 절에 살면서 교화하기에 마음을 써서 그 제자 능일(能一), 법연(法演) 등을 시켜 화연(化緣)하여 다시 수리하고는, 그 두 사람의 사적을 기록할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풍암(楓岩)이라는 사람이 봉래산(蓬萊山)에서 돌아왔다. 성천 스님은 그에게 기문(記文)을 청하기 위해 갑자기 그에게 물었다.

 『이 산에 있는 백여 개의 암자가 다 이름은 뜻에 의하여 지어지고, 뜻은 이름에 의하여 드러나는데, 오직 빙발(氷鉢)만을 모르니 범어(梵語)이기 때문인가? 혹은 당언(唐言)이기 때문인가? 전의 기록에 그 이름을 해석하지 않아 뒷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이니, 혹 상고한 바 있으면 그대는 설명해 보라.

 『빈발라굴(鉢羅崛)은 서역(西域)의 절 이름으로서 왕사성(王舍城)의 기사굴산(耆闍崛山)에 있는데, 가섭 존자(迦葉尊者)가 아난(阿難)과 함께 석가 여래께서 말씀하신 금문 보장(金文寶藏)을 결집(結集)한 곳이다. 후한 영평(後漢永平) 三년 무신(戊申)에 두 범승(梵僧)이 三十二 장경()을 백마(白馬)에 싣고 왔고, 당 정관(唐貞觀) 七년 계사(癸巳)에 현장 법사(玄裝法師)가 천축(天竺)에 여행하다가 전해 온 범본(梵本)의 경론(經論) 무릇 六백 三十七부(), 一천 三백 三十五권은 다 이 굴에서 나와 서역에 흩어지고 동구(東區)에 흘러 들어 온 것이다.

 생각하면 빈발라(鉢羅)는 서천(西天)의 말로서, 당언(唐言)으로는 칠엽암(七葉岩)이다. 왜냐하면 사문(沙門) 무기(無寄)가 지은 석씨 행적(釋氏 行迹)에 말하기를,

 「부처님이 열반하신 뒤에 욕계(欲界) · 색계(色界)의 여러 하늘이 대가섭(大迦葉)에게 나아가 예배하고 사뢰기를, 「부처의 해가 지고 법의 등불이 꺼지려 합니다. 그러므로 큰 자비로 불법을 건립하여 중생들을 복되고 이롭게 하십시오」하였다.

 그 때 대가섭은 여러 하늘의 청을 받아들여 법장(法藏)을 집결하려고 무학(無學)의 천인(千人)을 가려 뽑아 칠엽암(七葉岩)으로 갔다.

하였으니, 이것이 그 증거이다 하였다. 옛날 사람들은 반드시 그 굴의 범어(梵語)를 인용하였는데 뒷사람들이 빙()이라고 잘못 일컬었다. 그리하여 빈발()이라고 고쳐썼다.

 기와를 고쳐 덮어 바람과 비를 막고, 二간()을 터서 한 방으로 만들어 六자당(慈堂)을 넓히고, 향적전(香積殿)을 절 남쪽으로 옮겨 화재(火災)의 염려를 없애고, 서쪽 추녀를 헐어 장실(丈室)을 밝히고, 창고의 아랫방을 고쳐 따로 숙정소(熟淨所)를 만들었다. 그 옛 것을 고치려 새 것을 보탠 제도가 여럿의 뜻에 맞았으니, 어찌 이로 인해 三보()가 오래 머물지 않겠는가?

 스님은 지혜를 쓰는 두 사람과 힘을 쓰는 두 사람의 소위(所爲)가 비록 유위(有爲)의 공덕과 같지마는, 그들에게 三공()을 말하여 그 마음을 항복 받고, 일체 짓는 바가 다 제일의제(第一義諦)에 올라간다는 것이 이것을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숭정(崇禎) 八년 봄 二월에 시작하여 六월에 마쳤다.

 인과(因果)를 바로 믿는 뒷사람들로 하여금 배와 뗏목이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이니, 그러므로 자액(字額)을 고치고 아울러 三인()의 공을 적어 이것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모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보개산 대승암기(寶盖山大乘庵記)

 

 풍악산(楓岳山)의 색름()이라는 스님은 그 아버지 박()씨가 법의 힘으로 음계(陰界)를 면하고 연방(蓮邦)에 왕생(往生) 하기를 빌면서, 모든 준비를 다 갖추어 대승암(大乘庵)을 보개산(寶盖山) 북쪽에 세우고, 서산(西山)의 문인(門人) 언기(彦機)가 그 산수(山水)의 뛰어남과 절을 세운 노고와 그 스님의 행적으로 이 기문(記文)을 쓴다.

 보개산은 철원(鐵原)에서 二十리 되는, 경기도와 강원도가 붙은 사이에 있다. 이 고을에 좋은 산수가 十으로 셀 수 있지마는 철원이 거기서 제일이요, 四령() 사이에 있는 절이 한둘이 아니지만 대승암이 가장 좋다. 산이 몇 리를 흘러 내려오다가 그 주산(主山)인 금화봉(金華峰)이 되고, 봉우리 밑에 대()가 있으며, 대 위에 배나무가 있어 그 구멍이 입이나 코와 같고 가지는 높고 잎이 없는데 세상에서는 그것을 나옹(懶翁) 스님이 심은 것이라 한다.

 대 밑의 푸른 벼랑의 높이는 백척(百尺)인데 떨어지는 물이 폭포를 이루어 고이는 물은 깊고 잔잔하며, 그 소리는 마치 결환(玦環)을 부수는 것 같다. 폭포 아래로 수십보 쯤에 통으로 물을 받아 두드리게 하니 맑은 날 우뢰가 산을 진동하였다. 시내 위는 산마루가 꿈틀꿈틀 용처럼 달려 절 앞을 지나는데 푸르름이 처마()끝을 의지하여 있으니 이른바 푸른 메뿌리로 병풍을 삼았다는 것이며, 산기슭 밖에 봉우리 하나가 홀로 우뚝 서서 읍()하는데 그것이 곧 금학봉(金鶴峰)이다.

 동북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천연으로 된 돌문이 있고 길이 그 가운데를 뚫었다. 그 돌문을 지나 멀지 않은 곳에 두 시냇물이 모여 쏟아내려 구렁이 되었는데 바위와 시내는 기이하고 험하며, 수목은 우거져 그늘을 이루어 인간 세상을 멀리 떠나 나무군도 볼 수 없으니, 도원(桃源)의 아름다움도 이 보다는 못할 것이다.

 만력(萬曆) 四十八년에 스님은 풍악산에서 와서 파집사(破執寺)의 옛 터의 돌을 안정시켜 둘 것은 두고 없앨 것은 없애어 그 기초를 튼튼히 한 뒤에 장석(匠石)을 부르고 재목을 모아, 그 이듬해 봄에 금화봉(金華峰)을 등지고 달린 폭포에 다달아 몇 칸의 절을 세우니, 그 대()는 뜰의 남쪽이 되고 배나무 그늘은 동쪽을 막았다. 또 주방()에 잇대어 육자당(六慈堂) 몇 칸을 세우고 육자당에 잇대어 약간 높이의 고경루()를 북쪽에 세웠다.

 또 그 이듬해에 스님의 친구인 담연(湛演) 도인이 화연(化緣)이 되어 양공(良工)에게 청하여 불상(佛像) 三존()을 만들어 연화좌(蓮花座)에 봉안(奉安)하고, 겸하여 영산회(靈山會)의 그림을 그려 벽의 탱화(幀畵)로 걸었다.

 또 그 이듬해에는 극락 거사(極樂居士) () 아무를 만나 기와를 구워 덮게 하였으며, 또 그 이듬해에는 단청(丹靑)을 마치고 모든 도구를 다 갖춘 뒤에는, 재물과 곡식을 보시하는 시주들을 청하여 불사(佛事)를 지음으? 그 경사는 모두 끝났다.

 전에 「집착을 깨트림(破執)」이라 이름한 것은 三乘의 큰 어두움의 혹견(惑見)을 깨트린다는 것이요, 지금 대승()이라 한 것은 一승()의 신령스레 비치는 참지혜의 개벽을 말하는 것이니, 전자(前者)는 한 점의 흐림도 없는 가을 허공이요, 후자(後者)는 푸른 하늘의 밝은 해이다.

 대체로 터는 지난번의 터이고 임대(林臺)는 계곡의 지난번의 임대와 계곡이지만 지난번은 좁았고 지금은 넓을뿐 어찌 다른 물건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회삼귀일(會三歸一)은 실로 연경(蓮經)의 최상승(最上乘)이니, 스님이 옛 것으로 지금 것과 바꾼 뜻이 여기 있는 것이다.

 스님은 송도(松都) 사람이다. 十七세 때에 묘향산에 들어가 등계(登階) 대사를 섬기었고, 이내 봉래산에 들어가 청련(靑蓮)의 방에서 八교()를 다 배워 통했었다. 심법(心法)을 전할 때는 염화(拈花)의 묘한 뜻으로 업을 삼아, 유위(有爲)의 공덕에 대해서는 귀를 막고 달아났었다.

 늙으막에는 四은()을 갚기 위해 몸소 절을 세웠는데, 어려운 세상에 사람들이 고생할 때를 당해 이런 큰 일을 하였으니, 그 도덕이 한 때에 중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一설()이 있으니 또한 알아야 한다. 즉 옛날 양왕(梁王)이 절을 세우고 탑을 만들었다 할 때, 달마(達摩)는 조그만 공덕도 없다 하였고, 현자(賢子)가 지팡이를 꽂고 절을 세웠다 할 때 밀암(密庵)은 그 공덕이 하늘과 땅처럼 장구하여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였으니, 스님이 대승암을 세운 것은 공덕이 있다 해야 할 것인가, 없다 해야 할 것인가? 만일 공덕이 있다고 한다면 달마를 저버림이 될 것이요, 만일 없다고 한다면 밀암을 거스림이 될 것이니, 이 뜻을 어떻게 해득해야 할 것인가?

 만일 이 뜻을 안다고 한다면 오직 박씨의 은혜만 갚을 뿐이 아니라, 또한 불조(佛祖)의 은혜와 승당(僧堂)을 세운 단신(檀信)들의 은혜도 갚는 것이 될 것이다. 이로써 기문으로 한다.

 벽을 쓸고 이 글을 쓰는 때는 천계(天啓) 三년 계해년 가을 九월이다.

 

 봉래산 운수암 종봉영당기(蓬萊山雲水庵鍾峰影堂記)

 

 천계(天啓) 五년 을축년 봄에 봉래산 주인 송월(松月) 스님이 종봉 대사(鍾峰大師)를 위하여 그 영자당(影子堂)을 운수암(雲水庵)에 새로 세우고, 그 제자 천오(天悟)를 보내어, 서산(西山)의 문인(門人) 언기(彦機)에게 기문(記文)을 청하면서 말하였다.

 『이 영자당을 세우기는 신유년인데 아직 기문이 없는 것은, 선사(先師)를 깊이 알고 우리들의 일을 돌아 보아 기록할 사람을 기다린 것인데, 그 일을 하기에는 자네만한 이가 없으니 자네는 사양하지 말라.

 언기는 천오에게 말하기를,

 『언기는 본래 그대 송월 스님을 어질다 하였거니와 하물며 선사(先師)의 일에 관계 되는 것인데 어찌 그대 부탁 뿐이겠는가?

하고, 곧 四대사(大師)의 기연(機緣)과 결구(結構)의 연월(年月)과 단신(檀信)들의 모연(募緣)한 공덕을 써서 기문으로 삼는다.

 형상이 없는 진체(眞體)는 한 자 정도의 생초에 그릴 수 없거늘, 허공을 메우는 영각(靈覺)이 어찌 종()과 같은 돌에 가두어지겠는가? 비단에 그림을 그리고 돌을 깎아 세우는 것은 윗사람의 사모하는 정성과 효도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법안(法眼)이 하늘로 돌아가매 우진()이 그 형상을 그렸고, 언우()를 웅이(熊耳)에 장사지내매 양황(梁皇)이 그 진()을 본뜬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서역(西域)과 중화(中華)에 그 제도가 끊이지 않고 계속했던 것이니, 지금 이 영당(影堂)도 또한 그런 것이다.

 서산(西山)은 관서(關西) 사람이니 선종(禪宗)의 대선(大選)으로서, 조계(曹溪) · 화엄(華嚴) 양종(兩宗)의 종사(宗事)를 맡았고, 사자 법호(賜紫法號)는 국일 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 八十五세 때 묘향산(妙香山)에서 입적(入寂)하시니, 사유(闍維)하여 황금 정골(黃金頂骨) 몇 조각을 받들고, 사리(舍利) 세 개를 얻어 보현사 서쪽 안심사(安心寺)에 석종(石鍾)하고, 영자(影子)는 내원(內院)의 청허당(淸虛堂)에 안치(安置)하였다.

 또 청련(靑蓮) 대사가 사람을 시켜 한 조각을 가져다 봉래산으로 돌아 왔는데 五색 구슬 두 개를 얻어 곧 부도(浮圖)를 세웠다. 청련 대사가 세상을 떠나자 그 문인(門人)들이 또 청련의 사리를 등계 밑에 탑을 세워 간직하니, 그 一기()와 쌍정(雙旌)은 유점사(楡岾寺) 북쪽에 있다.

 종봉(鍾峰)은 영남(嶺南) 사람이다. 일찌기 선과(禪科)에 뽑히고, 일어나서는 팔도의승(八道義僧)의 대장(大將)이 되고 대양(大洋)을 건너 부상(扶桑)에 사신(使臣)으로 갔는데, 관직을 높여 자()를 하사하였고 법호(法號)는 국일 도대선사 부종수교 보제생령 홍제존자(國一都大禪師扶宗樹敎普濟生嶺弘濟尊者). 六十七세 때에 가야산(伽倻山)의 해인사(海印寺)에서 세상을 떠나니, 그 부도와 영당을 해인사 서쪽에 세웠다.

 부휴(浮休)는 도가 높고 덕이 중하여 대중의 귀의처(歸依處)가 되었는데, 지리산 칠불사(七佛寺)에서 세상을 떠나니, 그 절 언덕에 자리 잡아 탑을 세우고 영골(靈骨)을 넣었다. 부휴는 등계와 함께 부용(芙蓉)을 스승으로 하고 또 등계를 섬기었다. 그리고 청련은 종봉과 함께 등계에서 배웠는데 종봉의 형벌이 된다.

 지금 이 四문()의 자손들이 임제(臨濟)를 벗어나지 않는 것은 그 본원(本原)이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 동방의 태고 화상(太古和尙)이 중국 하무산(霞霧山)에 들어가 석옥(石屋)의 법을 이어 환암(幻庵)에게 전하고, 환암은 소온(小穩)에게 전하고, 소온은 정심(正心)에게 전하고, 정심은 벽송(碧松)에게 전하고, 벽송은 부용에게 전하고, 부용은 등계에 전하고, 등계는 종봉에게 전하였다.

 이 八세() 가운데 등계가 더욱 미친 물결을 돌이키고 퇴폐한 기강을 바루는 힘이 있어서, 뼈를 바꾸는 신령스런 방편과 눈을 뜨게 하는 금 빗치게로 선교(禪敎)의 혼잡에서 옥석(玉石)을 구별한 사람, 보검()을 휘두를 때 아무도 그 칼날을 범하지 못하는 사람, 입을 다물고 고요히 관()하여도 죽은 재()에 떨어지지 않는 사람이다.

 죽이고 살리는 부젓가락과 망치로 모든 영재(英才)를 만들어 내고, 불조(佛祖)의 광명으로 씻어 인간과 천상의 눈을 틔운 것은 이 때처럼 성한 때가 없었으니 그 누구의 공이겠는가. 그러므로 기린(猉獜)과 난봉(鸞鳳)이 동서에서 떨치고 날을 때 三대사(大師)와 형제가 된 사람은 수十 명이다. 이 당()에 있지 않은 이는 오직 당()의 주인으로서 그에 참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종봉 대사는 그 난봉들 가운데서 홀로 뛰어났었다. 등계의 골수(骨髓)를 얻지 못하고야 어찌 도가 三한()을 기울이고 그 이름이 四해()에 떨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마치 영산(靈山)의 백만 대중 가운데서 금색 두타(金色頭陀)가 홀로 첫째인 것과 같은 것이다.

 송월(松月) 스님은 四당()에 오르고 그 방 안에 들어가 그 도를 전하고 세상을 교화하였다. 그리고 선사(先師)의 은혜를 갚으려고 공수()에게 명령하여 한 당()을 만들고, 단청(丹靑)하는 이를 청하여 四진()을 그리고, 법랍(法臘)의 차례대로 나누어 앉혀 당()에 봉안(奉安)하고, 자신은 편방(便?)에 있으면서 아침 저녁으로 예배하였으니, 다만 종봉을 인연하여 실로 그 뜻을 받들어 종()을 삼았기 때문에, 오로지 종봉이라는 이름을 취해 그 당호(堂號)를 삼은 것이다.

 그 때 공양을 마치고 사람들은 다 돌아가고, 그 일을 맡은 공은 낙양 임씨(洛陽林氏)에게 있었으니, 임씨는 송월 스님의 법문을 듣고 발심하여 청신녀(靑信女)가 된 사람이다.

 운수(雲水) 청련 대사의 살던 집도 수리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담연(湛演) 비구를 시켜 기와를 다시 이고 단청을 새롭게 하였다. 계해년 봄에는 또 아무를 시켜 판도방(辦道房)과 동쪽 행랑(行廊) 몇 간을 세우고, 크고 작은 시루와 불기(佛器) 등 물건을 모두 갖추었다.

 송월 스님의 그 이름은 응상(應祥)이다. 그는 부드럽고 인자하며, 너그럽고 후한 장자(長者)이다. 그 스승을 섬기는 정성은 생사에 한결같으며, 덕은 선사(先師)와 맞먹고 그 이름은 세상이 다 알았다. 왜냐 하면 스승의 도를 빚내어 드날리고, 아름다운 이름을 후세에 전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문호(門戶)를 다투어 싸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혹은 갈래만 알고 근원을 모르는 이가 있으며, 혹은 삶에 연연(戀戀)하고 죽음에 아득해 하는 이가 있다. 그 도는 비록 높으나 행에 흠이 있고 덕에 혹 결함이 있으면 그를 헐어 업신여기는 이가 있다. 반가이 웃고, 그렇다 하고, 따르면서 결코 잊지 않겠다 하다가도, 죽고 사는 마당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그 흠을 잡아 이전의 은혜를 아주 잊어 버리는 자도 있다. 만일 그런 자들로서 이것을 보면 어찌 그 마음에 부끄럽지 않겠는가?

 언기도 등계를 섬기면서 三문()에 비()를 잡은 자로서 천오(天悟) 상인(上人)을 따라 송월 스님과 함께 선사님께 예배하려 하나니, 스님은 이 언기를 이해하겠는가!

 

 서산행적초(西山行蹟草)

 

 대사의 휘()는 휴정(休靜)이요 호()는 청허(淸虛)인데, 묘향산(妙香山)에 오래 살았기 때문에 서산(西山)이라 일컫는다.

 속성(俗姓)은 최()씨요 완산(完山) 사람이다. 그 아버지 세창(世昌)은 기자전감(箕子殿監)을 사직하고 마지막에는 향관(鄕管)을 살았다. 증고조(曾高祖)는 태종조(太宗朝)에 용호방(龍虎榜)을 얻고 창화(昌化)로 옮겨 살았기 때문에 창화를 고향이라 한다. 외조(外祖)인 김현윤 우(金縣尹 禹)가 연산군(燕山君)에게 죄를 짓고 안릉(安陵)에 귀양을 가서 살았기 때문에 마침내 서관(西關) 백성이 되었다.

 대사는 정덕(正德) 경진년에 났다. 먼저 해인 기묘년에 그 어머니 김씨가 꿈을 꾸었는데, 한 노파가 읍()하고 말하기를,

 『대장부 아들을 잉태하였으므로 와서 축하합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곧 임신하여 대사를 낳았다.

 대사는 나자 피부와 뼈가 맑고 트이었으며, ?과 정신이 보통과 달라 겨우 九세에 글을 잘 지었다. 그 고을 원 이 공(李公)이 대사를 데리고 서울로 올라가 반궁(泮宮)에 두었다. 대사는 거기서 三년 동안 관하(館下)재예(才藝)를 겨루다가 두 번이나 사람들에게 패했다. 대사는 발분(發憤)하여 남방으로 지리산에 놀면서 산천을 다 구경하고, 이내 석씨(釋氏)의 글을 보다가 「심공(心空)에 급제하려면 반드시 대장부라야 한다」는 대목에 이르러, 비로소 지금까지 배운 것은 한갖 빈 이름에 지나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능인 장로(能人長老)에게서 머리를 깎고 영관(靈觀) 대사에게서 법을 들었다. 三十세 때에 선과(禪科)에 뽑히고, 겸하여 선교 양종(禪敎兩宗)의 종사(宗事)가 되었다. 하루는 탄식하기를,

 『내 출가한 본 뜻이 어찌 이런 일에 있겠는가!

하고는, 그 직책을 버리고 금강산에 들어가 미륵봉(彌勒峰) 밑에 홀로 있다가, 산 달이 허공에 오르자 천지가 환해지는 것을 보고, 이연(怡然)히 깨달아 투기시(投機詩)를 지었으니, 「세 발 달린 금까마귀가 밤중에 나른다(三足金鳥半夜飛)」라는 귀절이었다.

 기축년에 도적을 돕는다는 모함을 입고 잡혀 갔다. 임금은 그 초사(招辭)를 보았으나 털끝 만한 죄도 없었다. 그리하여,

 『상인(上人)이 어찌 운림(雲林)의 나그네로 이런 요망한 일을 하겠는가?

하고, 그 시집을 가져다 친히 보셨다. 그리하여 어필(御筆)의 대()를 하사(下賜)하고 위로하셨다.

 임진년에 왜적(倭賊)이 三경()을 뺄 때 대가(大駕)는 용만(龍灣)으로 거동하셨다. 임금님은 문득 생각하고 좌우(左右)에 물으셨다.

 『그 아무 상인(上人)은 지금 어디 있는가? 어찌 나를 잊었는가?

 곧 사람을 시켜 대사를 불러왔다. 대사가 와서 주렴 밖에 앉자 임금님은

 『이처럼 위급한 때인데 구제하여 주시오.

하셨다. 그리고 곧 팔도 십육종 선교도총섭(八道十六宗禪敎都摠攝)으로 임명하셨다. 대사는 느꺼워 울면서 물러나와서는 곧 순안 법흥사(順安法興寺)로 달려가, 거기서 승병(僧兵)을 모아 천병(天兵)을 도왔다.

 그 때 왕사(王師)가 서경(西京)을 회복하자 적은 남쪽으로 달아났다. 그들을 쫓아 송도(松都)까지 나아가 성세(聲勢)로 서로 돕고, 다시 남쪽으로 한진(漢津)을 건너 안성(安城)에 진을 쳤다.

 대사는 나이 늙어 승총(乘銃)할 수 없음을 스스로 생각하고, 그 제자 유정(惟政) · 처영(處英) 등을 불러, 승병들을 그들에게 맡기면서

 『나라를 위하는 내 마음이야 시석(矢石)에 죽은들 무슨 한이 있겠는가? 다만 나이 장차 八十인데 어찌 대장(大將)의 직책을 맡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대장을 바꾸는 것이니, 너희들은 힘을 합해서 하라.

하였다. 그리고 총섭(摠攝)의 인()을 나라에 바치고, 묘향산의 옛 절로 돌아갔다.

 난리가 끝나고 공을 의논할 때, 조정에서는

 『비록 산인(山人)이라 하더라도 공이 있으면 상이 없을 수 없다.

하고, 직호(職號)를 내려 국일 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라 하였다.

 대사는 사람들에게 말할 때는 언제나 임제종풍(臨濟宗風)을 빠뜨리지 않았으니, 그것은 그 본원(本原)이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 동방의 태고(太古) 화상이 중국 하무산(霞霧山)에 들어가 석옥(石屋)의 법을 받아서는, 그것을 환암(幻庵)에게 전하고, 환암은 구곡(龜谷)에게 전하고, 구곡은 정심(正心) 등계에게 전하고, 정심 등계는 벽송 지엄(碧松智嚴)에게 전하고, 벽송 지엄은 부용 영관(芙蓉靈觀)에게 전하고, 부용 영관은 서산 등계에게 전하였는데 석옥은 곧 임제의 적손(嫡孫)이다.

 이 八대 가운데서 오직 서산이 미친 물결을 돌이키고 퇴폐한 기강을 바루는 힘이 크게 있었으니, 이른바 뼈를 바꾸는 신령스런 방편과 눈을 뜨게 하는 금빗치게이었다. 선교(禪敎)의 혼잡에서 옥석(玉石)을 가진 사람,보검()을 휘두를 때 아무도 그 칼날을 범하지 못하는 사람, 입을 다물고 고요히 관()하면서도 죽은 재()에 떨어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죽이고 살리는 부젓가락과 망치를 잡고 뭇 뛰어난 사람을 만들어 내고, 불조(佛祖)의 광명으로 씻어 인간과 천상의 눈을 띄웠으니, 이처럼 성대한 일이 없었다. 이는 누구의 공이겠는가?

 대사의 제작(制作)으로는 석가여래비문(釋迦如來碑文) 一통(), 선가귀감(禪家龜鑑) 一권, 선교석(禪敎釋) 一권, 운수단(雲水壇) 一권, 선교결(禪敎決) 三지()와 시영(詩詠) 및 제 · 소 · 기문(祭疎記文) 등 三권이 세상에 나돌고 있다.

 아아, 왕실(王室)을 보안(保安)하고 불조(佛祖)를 거듭 빛낸 사람으로서, 개국(開國)이래에 누가 그를 따를 것인가!

 八十五세에 묘향산에서 입적(入寂)하니, 때는 갑진년 一월 二十三일이다. 입실(入室) 제자 원준(元峻), 인영(印英) 등이 사유(闍維)하여 영골(靈骨) 몇 조각을 받드니, 한 조각에서는 원준(圓峻) 등이 금강 사리(金剛舍利) 두개를 얻어 부도를 세우고 보현사 서쪽 안심사(安心寺)에 봉안하니 왕사 나옹(王師懶翁)의 급()이었고, 한 조각은 자휴(自休) 등이 금강산에 가지고 와서 향을 사르고 정성스레 기도하고, 또 염주 몇 알과 함께 돌에 넣어 유점사(楡岾寺) 북쪽에 묻었다.

 

 경판후발(經板後跋)

 

 우리 석가여래님께서 말이 없는 가운데서 교해(敎海)의 물결을 일으켜, 四十九년 동안 三장() 十二부() 경전을 말씀하신 것은 무엇 때문인가? 중생들에게 청정한 각지(覺地)를 열어 보여 생사를 건너 三덕()의 저쪽 언덕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이니, 가위 미혹의 강의 보배 뗏목이요, 깨달음 길의 금 노()라 할 수 있다.

 그 보장(寶藏)이 후세에 퍼져 모든 미혹한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는, 수재(繡榟)로써 그 금언(金言)을 영원히 보전하는 것만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 국조(國朝)가 한창 성할 때에는 상하(上下)가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판본(板本)을 만들어 산문(山門)에 간직해 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 되고 또 난리를 겪으면서 잃어 버린 것이 많고, 또 병화(兵火)에서 보존된 것은 글자의 획이 이그러져 온전히 읽을 수 없어 거의 없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마침 어떤 사문(沙門) 아무가 광대한 마음을 내고 네 가지 큰 원을 세우고는 말하기를,

 『만일 대승 경전을 다시 판각(板刻)하여 중생 세계에 널리 펴,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 종성(種性)을 피워 내게 한다면, 그것은 거의 부처님의 은혜를 갚게 되는 것이요, 부처님의 은혜를 갚는 것은 곧 四은()을 갚는 것이다.

하였다. 그리하여 곧 화엄경, 법화경, 원각경, 능엄경, 반야경, 범망경 등 경전과 전등(傳燈), 염송(拈頌), 선요(禪要), 서장(書狀), 선원(禪源), 별행(別行), 서산집(西山集)을 경기도 삭녕(朔寧) 용복사(龍腹寺)모으니, 그 판목(板木)을 사들이고 음식을 공급한 공이 그 절반은 자기 재산에서 나온 것이다.

 그 일을 시작하자 四방의 공인(工人)들이 부르지 않아도 모두 왔는데, 그 중에서 조각하는 솜씨가 제일 좋은 사람 三十명을 뽑았다. 그리하여 풍년과 흉년을 가리지 않고, 추우나 더우나 쉬지 않으면서 五, 六년에 이르기까지 마치매, 조석(朝夕)이 부족하다 하여 하루도 그 역사를 그쳤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일을 마치고 경축하는 자리를 크게 베풀고, 선교의 여러 책에서 시험삼아 약간의 권을 인출(印出)하여 그 모임에 참여한 이에게 보시하고, 그 나머지는 여러 절에 분포하니, 그것은 눈이 있는 이는 다 보고, 귀가 있는 이는 다 들어, 그 보고 들음으로써 여래의 묘하고 장엄한 경계에 들게 하기 위해서이다. 만일 그렇다면 저 축건(竺乾)의 풍광(風光)이 오늘에 이르러 해동(海東)의 봄에 다시 피는 것이 아니겠는가.

 대개 자리(自利)란 성문(聲聞)과 연각(緣覺)이 소승(小乘)이 된 까닭이요, 이타(利他)란 보살이 대승(大乘)이 된 까닭이며, 이리원성(二利圓成)이란 여래가 최상승(最上乘)이 된 까닭이다.

 지금 아무가 여러 경전을 다시 판각(板刻)하여 인간과 천상을 다 깨우치니, 이것은 자리일 뿐 아니라 또 이타도 되고, 오직 이타만이 아니라 또 이리원성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른바 광대한 마음과 무량한 서원은 성문 소승의 마음이 아니요 곧 보살 대승의 마음이며, 보살 대승의 마음이 아니라 곧 여래의 최상승의 마음이다.

 그 공덕을 실을 만하기에 경전 끝에 적어 이 경전을 읽는 뒷사람에게 보이는 것이다.

 

 보현법당 권문(普賢法堂勸文)

 

 천지 만물과 한 몸이 되어, 고요하면 음()과 그 근원을 같이하고, 움직이면 양()과 그 물결을 같이하며, ()은 대천(大千) 세계에 화()하고, 은혜는 만민(萬民)에 미치는 것이 다 성인(聖人)의 도()이다.

 그러므로 공자(孔子)는 천하의 주부군현(州府郡縣)에 제사 지냈고, 석씨(釋氏)는 천자의 명산 승구(名山勝區)에 예배한 것이다.

 지금 말하는 이 대웅전(大雄殿)은 신라 때에 창건하여 그 이름이 고려 때에 전하였으므로, 거룩하고 밝은 임금님이 대를 이어 높이 받들었다. 그 전각(殿閣)의 웅장하고 화려함과 그 금벽(金碧)의 곱고 분명함은 저 기원정사(祇園精舍)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쩌랴? 갑술년 봄 갑을(甲乙)의 동북풍은 송도(宋都)의 익새(益鳥)를 날려 보냈고, 병정(丙丁)의 뜨거운 불은 주옥(周屋)의 까마귀를 흘려 이루었으니, 산천이 빛이 없어 쓸쓸한 것은 영명(永明)의 옛터요, 새와 짐승들만이 슬픔을 띠고 부질없이 남아 있는 것은 [5]대운(大雲)의 자취이다. 미덥기는 청산은 예와 같고 보배 탑은 아직도 남아 있으니, 봄바람이 돌아오면 마른 나무에 꽃이 필 줄을 어찌 알겠는가?

 그러므로 홀어미(孀妻)의 힘을 헤아리지 않고 부주(不周)의 높이를 이루려 하나니, 한 삼태기의 흙을 얻지 못하면 어찌 아홉 길의 산을 이룰 수 있겠는가? 선악의 과보는 각각 그 나름에 있는 것이니, 지금 복업(福業)을 닦는 것을 어찌 마음에 의심하겠는가? 청하노니 여러 선남녀들은 빨리 삼보리(三菩提)의 마음을 내시라.

 

 보현사 법당 중창권문(普賢寺法堂重創勸文)

 

 해내(海內)의 명산(名山)에서 묘향산을 신령이 내린 복지(福地)라 하고, 나라 안의 선찰(禪刹)에서 보현사가 입실(入室)의 법당이 된다. 향로(香爐)의 여러 봉우리에는 전단(栴檀)의 기운이 가득 맺히어 있고, 금강(金剛)의 한 갈래에는 영원(靈源)의 물이 언제나 흐른다. 천 길의 쇠사슬은 금승(金繩)을 푸른 절벽에 걸어 놓았고, 만 발의 은황(銀潢)은 천하(天河)를 동천(洞天)에 쏟는다. 단군(檀君)이 유희하던 대()에 숲의 연기가 예와 같은데 고려가 피해 숨은 굴에는 시내의 돌이 아직도 새롭다. 흰 코끼리는 구름을 타고 대사(大師)의 모습에 멀리서 예배하고 누른 용은 돌을 이고 각황(覺皇)의 궁전을 직접 본다.

 이 절은 신라 때 창건하여 그 이름이 고려 때까지 전해지는 것으로서 탐밀(探密) 장로가 세운 것이요, 원황 태조(元皇太祖)의 원당(願堂)이다. 전당(殿堂)은 우뚝하고 낭무(廊廡)는 깊숙한데, 층층한 다락과 첩첩한 누각은 금벽(金碧)이 번쩍거리고 채색 그림은 그 아름다움을 다하였다.

 더구나 이 법당은 신령이 깃들인 큰 집이요 경사를 기르는 신령이다. 八회()의 도량(道場)을 일으켰고, 三휴()의 묘관(妙觀)을 열었으니, 성대히 사문의 육지와 바다가 되고, 참으로 용상(龍象)의 여러 하늘을 이루었다. 천지가 부지하매 병화(兵火)의 어지러움에 들어가지 않았고, 신령이 호위하매 오랫동안 회록(回祿)의 재앙이 끊어졌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갑술년 봄에 갑을(甲乙)의 바람이 생기고 병정(丙丁)의 불이 일어났으니, 붉은 벽돌이 모두 타서 쓸쓸하기는 영명(永明)의 옛터요, 푸른 기와가 다 그을려 참담하기는 대운(大雲)의 남은 자취이다. 은당(銀鐺)이 땅에 떨어졌는데 부질없이 산수의 소리만 남았고, 가시 덤불이 하늘에 닿았는데 누가 금사(金沙)의 땅이라 하였던가? 미덥던 대천(大千)이 함께 무너지매 풍륜(風輪)이 다시 허공에 맺히고, 초목이 나부껴 떨어지매 제석(帝釋)이 모두 그 쓸쓸함을 한탄한다.

 용흥(龍興)이 다시 일어서는 데에는 반드시 소찰(蕭察)의 공을 필요로 했고, 기수(祗樹)가 거듭 그늘지기에는 바로 급고(給孤)의 힘을 힘입었다. 물이 쌓여 바다를 이루고 티끌이 모여 산을 이룬다. 청하노니 여러 선남 선녀들은 물과 티끌의 배와 좁쌀을 아끼지 말고 산과 바다의 높고 깊음을 이루시라. 그리하여 무시(無施)의 공덕에는 반드시 허공을 채우는 큰 과보가 있음을 의심하지 말지니라.

 

 ?산보현사만세루부와권문(妙香山普賢寺萬歲樓覆瓦勸文)

 

 부처님은 三계()의 길잡이시고 四생()의 인자한 아버지로서, 그 은혜는 사계(沙界)에 흐르고 그 덕은 대천(大千)을 덮는다. 그러므로 三천 국토(國土)에 부처님 안 계시는 곳이 없어서, 각각 그 나라에서 나는 귀하거나 천한 재물로 궁전을 지어 받들어 섬긴다.

 어떤 부처 세계에서는 마니보배 그물을 만들어 그것을 덮고, 어떤 부처 세계에서는 자줏빛 구름이 그물로 덮으며, 어떤 부처 세계에서는 황금과 백옥으로 덮고, 어떤 세계에서는 구리와 쇠로 덮으며, 어떤 세계에서는 흙과 나무로 덮는다.

 그 재물의 귀하고 천함과 화려하고 질박함에는 각기 다름이 있지마는, 부처님을 받드는 마음은 평등하여 거기에는 가볍고 무거움이 없다. 이미 평등하여 가볍고 무거움이 없다면 그 뒤에 얻는 것에 있어서 어찌 거기 우열(優劣)이 있겠는가?

 지금 이 만세루(萬歲樓)는 우뚝히 웅장하고 화려하여 법당과 함께 여러 집채에서 뛰어났었다. 그런데 불행히 화재를 만나 만금(萬金)의 아름다운 누각이 모두 재가 되어 날아가 버렸으니, 신령이 참담해하고 새와 짐승들이 다 슬퍼하거늘, 하물며 거기 사는 사람들로서 어찌 차마 볼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산중에서 모두 다시 일으킬 꾀를 의논하고는 적당한 사람을 모아 각각 한 가지씩의 일을 주는데, 지혜가 뛰어난 사람에게 나이는 적더라도 일은 이룰 수 있기 때문에 그를 추천하여 기와 덮는 일을 맡겼다. 이 상란(喪亂)을 만난 뒤에 흉년이 들고 백성들은 궁핍하여, 선을 심어 복리(福利)를 구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마음으로 맹세하기를,

 『생()이란 다하면 그만이다. 혹 여러 하늘이 도와 조금이라도 베풀어 준다면 얼마나 다행이겠는가?

하였다.

 삼가 청하노니 여러 선가(善家)들은 혹은 소, 혹은 말, 혹은 한 자의 베, 혹은 한 말의 좁쌀로 그 힘에 따라 보시하여, 다 함께 보각(寶閣)을 이루고 다시 법음(法音)을 떨친다면 부처님을 향하는 정성이 극진하다 할 것이다.

 범부의 마음으로 헤아리면 황금의 집과 푸른 기와의 흙에 분?하는 바가 있겠지마는, 부처님 경계에 있어서는 다 같이 연대(蓮臺)요 보계(寶界)일 것이니 거기 무슨 차별이 있겠는가? 부처님에 있어서 차별이 없다면 사람에 있어서도 또한 차별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까 말한, 한 자의 베와 한 말의 좁쌀과 소와 말을 보시한 사람들이, 아니 보배 그물 밑에서 유희하고 자줏빛 구름의 누대에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티끌 세계의 박복한 중생들을 내려다 보고 서로 통탄하기를,

 『만일 선심을 내지 않으면 마치 저들과 같이 언제나 괴로운 세계에 빠져 있을 것이니 어찌 두렵지 않은가!

할 것이다.

 이 말이 미덥지 않거든 저 금선(金仙)님께 여쭈어 보라.

 

 선교원류심검설(禪敎源流尋)

 

 옛날 마조(馬祖)가 한 번 할()하자 백장(百丈)은 귀가 먹었고, 황벽()은 혀를 내둘렀고, 이 한 할은 곧 염화(拈花)의 소식이요, 또한 달마(達摩)가 처음 온 면목으로서, 즉 공겁(空刧)의 이전과 부모가 낳기 전의 소식이다.

 모든 불조(佛祖)의 기묘한 언구(言句)와 양구(良久)와 방()과 할()과 백천의 공안(公案)과 갖가지 방편이 다 여기서 나왔다. 은산 철벽(銀山鐵壁)이라 발 붙일 곳이 없고, 석화 전광(石火電光)이라 사의(思議)를 용납하지 않나니, 이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선지(禪旨)는 이른바 경절문(徑截門)이다.

 ()에는 四등()의 차별이 있다. 부처님이 처음 성도(成道)하시어 인연이 성숙한 보살과 상근(上根)의 범부를 위하여 二돈()을 말씀하시니 그것은 화엄(華嚴)이요, 성문을 위하여 四제()를 말씀하고 연각을 위하여 十二인연을 말씀하시니 그것은 아함(阿含)이며, 보살을 위하여 六도()를 말씀하시니 그것은 방등(方等)이요, 앞의 三승()을 위해 마지막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말씀하시니 그는 법화(法華)인데, 이것을 四교()라 한다.

 그러나 당기(當機)에는 차별이 있지마는 법에는 차별이 없다. 수왕(樹王)에서 일어나지 않고 녹원(鹿苑)에 놀며, 돈설(頓說)에서 곧 四제()를 말하나니, 그렇다면 선원(仙苑)과 각장(覺場)이 한 자리요, 화엄과 四제가 한 말씀이다. 화엄이 꼭 四제보다 깊은 것도 아니요, 四제가 꼭 화엄보다 얕은 것이 아니다. 다만 그 당기를 따라 대소(大小)의 차별이 있을 뿐이다.

 마치 하늘이 비를 내리면 초목이 그 비를 맞을 때 초목에는 그 장단(長短)이 있지마는, 그 비는 一미()인 것처럼 부처님 말씀도 그와 같아서, 그 가르침은 당기를 따라 다르나 그 실은 다 한 법이다.

 화엄에서 보인 바 마음이 곧 부처라는 것은 三승교(乘敎)에서 말하는 근경(根境)의 모든 법이다. 마음 밖에 경계가 없고 경계 밖에 마음이 없어서, 마음과 경계가 하나로 평등하고 진제(眞諦)와 속제(俗諦)가 걸림이 없는 것이니, 화엄에서 곧 보리를 얻는 것은 그 근기의 예리함이요 그 가르침의 훌륭함이 아니며, 아함에서 다만 편공(偏空)만 깨치는 것은 그 근기의 둔함이요 가르침의 얕은 것이 아니다.

 이것을 미루어 말하면 만일 뛰어난 근기와 큰 지혜라면 아함을 듣고도 곧 정각(正覺)을 이룰 것이요, 작은 근기와 얕은 지혜라면 화엄을 듣고도 하늘 끝으로 달아날 것이다.

 四교가 보이는 법체(法體)는 모두가 교묘하여 일만 법으로 한 마음을 밝힌 것이니 환화(幻化)에 즉()하여 실상(實相)을 보인 것이다. 그 보인 바는 근경의 모든 법이요, 그 깨치는 것도 근경의 모든 법이다. 허공에는 본래 꽃이 없는데 꽃을 보는 이는 병이요, 법에는 차별이 없는데 차별을 보는 이는 망()이다. 한 생각이 생기지 않으면 화택(火宅)이 곧 적광(寂光)이요 털끝 만큼이라도 어긋나면 적광이 곧 화택이다.

 선문(禪門)에서는 최하의 근기를 위하여 교()를 빌어 종()을 밝히는데 이른바 성() · 상() · 공()의 三종()이다. 이치의 길과 말의 길이 있어서, 그것을 듣고 이해하고 생각하기 때문에 원돈문(圓頓門)의 사구(死句)가 되나니, 이것은 의리선(義理禪)이요, 앞의 격외선(格外禪)이 아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도 일정한 뜻이 없는 것이요 다만 그 당자의 기변(機變)에 있는 것이다. 만일 말에 의해 실수하면 염화미소(拈花微笑)도 다 캐캐묵은 말에 떨어질 것이요, 만일 마음으로 얻으면 거칠고 고운 말이 다 실상(實相)을 말하는 것이다.

 범부는 생사를 보고 二승()은 열반을 본다. 모든 부처님이 세상에 나와 온갖 바른 법을 말씀하시는 것은, 다만 그 생사와 열반의 두 가지 그릇된 견해를 제도하려는 것 뿐이요 따로 할 일이 있는 것이 아니며, 두 사람이 법을 듣고 허물을 아는 것은, 다만 지금까지의 잘못된 견해를 고치는 것 뿐이요 따로 훌륭한 견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시는 것을 보고 세상을  떠나시는 것을 본다. 그러나 부처의 몸에 나고 죽으며 가고 오는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니요, 그 당자가 느낌이 있으면 보고 느낌이 없으면 보지 못하는 것이다. 마치 물이 맑으면 달이 나타나고 물이 흐리면 나타나지 않는 것과 같나니, 나타나지 않는 허물은 물의 흐림에 있고 달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이 보지 못하는 허물은 믿음이 없는 데 있고 부처님이 응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 몸은 허공과 같아서 본래 숨고 나타나 가고 오는 모양이 없다.

 이치로 말하면 부처란 자기의 본원(本源)이요 천진(天眞)이니 이것은 언제나 각관(覺觀)의 물결 가운데 있어 씩씩하게 활동하는데, 사람들이 각관으로써 그대로 두면 그는 범부요 지혜로써 비추어 보면 그는 부처이다.

 만일 누구나 일체 법에 있어서 색()이 곧 공()임을 알면 그는 유상(有相)에 걸리지 않을 것이요, 또 일체 법에 있어서 공이 곧 색임을 알면 그는 공무(空無)에 막히지 않을 것이며, 또 일체 법이 공도 아니요 색도 아니면서 공도 되고 색도 되는 것임을 알면 중도(中道)에 머물지 않을 것이니, 이 三관()을 뚫고 나간 것이 참 도인의 경계이니, 그것은 봄바람 부는 광야에서의 일기(逸驥)와 같고, 달 밝은 큰 바다에서의 신룡과 같은 것이다.

 비록 뛰어난 근기와 뛰어난 지혜가 경절문으로 들어갔더라도 신훈(新熏)을 면하지 못하면, 그것은 다만 저변(這邊)의 소식일 뿐이요 황각(黃閣) 안의 향상(向上)의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고향에 돌아옴이 모두 자손들의 일이지 조부(祖父)는 원래 문을 나지 않았다」고 한 것이니, 하물며 말을 의지해 믿어 들어가고, 공덕을 자꾸 쌓은 뒤에 이룸이겠는가? 그것은 한 생각도 내지 않고 천차만별을 그대로 끊어 버리고 본래 일없는 것만 못한 것이다.

 경절문의 공부는, 조사의 공안(公案)에 대해 때때로 거각(擧覺)하고는, 의심을 일으키어 성성(惺惺)하되 조급하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아 혼침(昏沈)과 산란(散亂)에 떨어지지 않고, 간절한 마음으로 잊지 않되 마치 아기가 어머니를 생각하듯하면, 마침내 깜짝할 사이에 한 번 터지는 묘한 경지를 볼 것이다.

 원돈문의 공부는, 한 신령스런 심성은 본래 청정하며 원래 번뇌가 없는 것임을 돌이켜 비추어 보아, 만일 경계를 대해 분별하는 마음이 생길 때는, 곧 그 분별이 일어나기 전을 향해 그것을 추궁하되 「이 마음은 어디서 일어나는가?」하라. 만일 그 일어나는 곳을 추궁하되 얻지 못하면 마음이 답답해 질 것이니 그것은 좋은 소식이다. 부디 놓아 버리지 않아야 한다.

 염불문의 공부는, 다니거나 섰거나 앉았거나 누웠거나 항상 서방을 향하여 존안(尊顔)을 바라보고 생각하면서 잊지 않으면, 목숨을 마칠 때에는 아미타불이 상연대(上蓮臺)로 영접할 것이다.

 그런데 이 마음이 곧 부처요 이 마음이 곧 六도() 만법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떠나 따로, 부처가 없고 마음을 떠나 따로 六도()와 선악의 경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목숨을 마칠 때에 부처의 경계가 앞에 나타남을 보더라도 반가와하는 마음이 없고, 지옥의 경계가 앞에 나타남을 보더라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어, 마음과 경계가 一체()가 되면 이것이 불이(不二)이니, 불이법문 안에 무슨 범성(凡聖)과 선악의 차별이 있겠는가? 이렇게 관찰하여 미혹하지 않으면 생사의 악마가 어디서 그를 붙잡을 수 있겠는가? 이 또한 도인(道人)이 악마를 제어하는 요절(要節)이니, 학자들은 부디 여기에 주의해야 한다.

 지금은 다만 선교 법문의 관절(關節)과 학자가 일상 마음을 써야 할 곳을 뽑아 적었다. 그 종풍(宗風)을 널리 나타낸 것으로 인천안목강요집(人天眼目綱要集)에 있고, 그 입교차제(入敎次第)와 돈점수증(頓漸修證)과 선교화회(禪敎和會)는 천태사교(天台四敎)와 원각현판(圓覺縣板)과 선원제전(禪源諸詮)에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번거롭게 적지 않는다.

 



[1], 기지(機指) ·· 근기(根機)에 따라 납자(衲子)를 지도하는 것.

[2], 이는 「지월(指月)」을 말함.

[3], 강한(江漢) ·· 양자강(揚子江)과 한수(漢水).

[4], 묵뇨(墨尿) ·· 거짓이 많은 사람.

[5], 대운(大雲) ·· 기세가 왕성한 구름. 여기서는 옛날의 번창했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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