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대장경 제82권

해 제

oṃ maṇi padme hūṃ 2026. 2. 24. 01:11

 해 제

 

 무용당집(無用堂集)

 

 무용(無用)은 조선(朝鮮) 효종 二년(孝宗 二年, 一六五一)에 오진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휘()는 수연(秀演)이며 무용(無用)은 그의 자()이다. 그는 용안(龍安)사람으로 고려(高麗) 태위 문양공(太尉文襄公)의 후예이다. 그의 증조부는 조선의 통훈대부(通訓大夫)로 무안(務安) 등지의 현감을 지냈고, 조부는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순천부사(順天府使), 한성좌윤(漢城左尹)을 지냈으며,아버지는 절행벽단첨사(節行碧團僉使)의 벼슬을 하였다.

 무용은 13세 때, 부모를 잃고 형에게 의지해 자랐으나 매우 곤궁하였으며, 그는 공부를 열심히 하여 가세를 일으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19세 때, 세상의 무상(無常)을 깨닫고 조계산 송광사 혜관노사(惠寬老師)를 찾아가 머리를 깎았다.

 22세 때, 선교(禪敎)를 함께 공부하기 위하여 침굉선사(枕肱禪師)의 문하에 들어가 우선 교학(敎學)을 배웠다. 침굉선사는 그의 인물됨이 비범함을 보고 백암화상(柏菴和尙)에게 보냈다. 백암을 찾아간 무용은 백암에게 입실(入室)하여 제자가 되었으므로, 벽암(碧巖)→취미(翠微)→백암(柏菴)→무용(無用), 이렇게 법통을 잇게 되어, 곧 백암의 증손이 되었다.

 그가 처음으로 강()한 곳은 금화동(金華洞) 신불암(新佛菴)이며, 그 뒤로는 학승이 구름처럼 모이고, 선암사(仙巖寺)와 송광사의 초빙을 받아 수 많은 학승을 제접하였다.

 그는 특히 희양(曦陽)의 백운암(白雲巖)을 좋아하여 오래도록 그곳에 은거하여 주석(住錫)하였으나, 一六八八년이래로는 줄곧 백암에게 사사(師事)하여 그의 법을 잇고, 백암이 베푸는 여러 곳의 법연(法筵)에는 반드시 참석하였다. 그 예로 낙안(樂安)의 증광사(澄光寺)에서 화엄경과 정토서(淨土書)를 개판(開板)할 때 백암을 수행하고, 화엄사의 화엄회(華嚴會)에 참석한 것 등을 들 수 있다. 그리하여 一七00년 백암이 입적(入寂)하자 백암의 강석(講席)을 이어받아 남방 불교계의 대종장(大宗匠)이 되었고 손색이 없었다.

 숙종 三0(一七0)에 이 강석을 사퇴하고 용문(龍門)의 은봉암(隱峰?)에 은거했으나 송광사 대중의 여러 차례에 걸친 청을 이기지 못해 송광사로 거처를 옮겼다. 숙종 四五년에는 영호남(嶺湖南)의 三백여 고승들이 모여 화엄학(華嚴學)과 선문염송(禪門拈頌)을 강해 주기를 간청하므로 사양하다 못하여 끝내 강을 하였으며, 혜심(慧諶) 이후의 석덕(碩德)으로 칭송되었다. 그리고 그해 十월에는 미타삼존상(彌陀三尊像)을 개조(改造)하고 염불에 전념하다가 입적하니, 나이는 69세요 법랍은 51세이다.

 그의 수 많은 제자 중에서 영해 약담(影海若坦)) · 함영상증(涵影尙澄) · 악서취심(樂西翠諶) 등이 으뜸이며, 그 중에서도 영암(?), 즉 영해(影海)를 법사(法嗣)로 손꼽는다.

 여기 옮긴 무용집(無用集)은 영해가 주가 되어 법어 · 식사(式詞) · 시문(詩文)을 모은 무용집 二권이다.

 

 천경집(天鏡集)

 

 천경(天鏡)은 자()이고 휘()는 해원(海源), ()는 함월(涵月), 속성(俗姓)은 이(), 함흥(咸興)사람이다. 숙종 17(一六九一) 정월에 어머니 조()씨에게서 태어났으나 三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한()씨에게서 자랐다. 일찌기 부모의 허락을 얻어 출가하려 했으나 허락을 하지 않으매 14세 때, 몰래 집을 나와 문주(文州) 도창사(道昌寺)에 들어가 석단(釋丹)스님에게서 머리를 깎고 능허 영지(凌虛英智) 대사에게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처음에는 북방의 영암(靈岩), 학곡(鶴谷), 월화(月華)와 남방의 낙암(洛岩), 남악(南岳), 회암(晦菴)등 여러 장로를 찾아 법을 배웠고, 화엄의 대가인 회암에게서 화엄을 배우고, 그 후 六년동안 환성(喚醒)대사에게서 三장의 교전(敎筌)을 배웠으며, 특히 화엄과 선문염송에 정통하였다. 이후 환성과는 법사(法嗣)의 관계를 이루었으나, 문인(門人) 성안(聖岸)이 쓴 스님의 행적에 따르면, 석존(釋尊) 69, 임제(臨濟) 31대 손으로 청허(淸虛)에 이르고, 편양(鞭羊) 풍담(楓潭), 월담(月潭), 환성(喚醒)을 거쳐 천경(天鏡)에 이른다 하였으며, 그의 여러 가지 글로 보거나 행적으로 보면, 그 법통을 이음에 부끄러움이 없음을 알 수 있다. 31세에 이미 강사로써 그 명성이 널리 퍼진 것으로 알 수 있고, 40여년 동안 납자로서 남과 북을 넘나들며 교화함에 친소(親疎)의 구별이 없고, 병자를 보면 병자를 돕고, 사자(死者)를 보면 극락왕생을 기원하고, 없는 자가 오면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내주어 헐벗은 이에게는 옷을, 굶주린 이에게는 밥을 주어 그 고난을 덜어주는 것으로 알 수가 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스님을 불심(佛心)이라고 불렀다. 31세에 입실한 이래, 75세에 이르는 45년 동안 남북을 오가며 교화한 행적이 실로 그러하였다.

 그가 입적한 해의 가을에는 이가 빠지면서 사리가 나왔고, 그해(英祖 46, 一七七0) 十二월, 세수 80, 법랍 65세로 입적하였다. 입적하기에 앞서 제자들에게 굳이 붓을 가져오게 하여 임종게를 남겼으니 아래와 같다.

 

 몸은 흰 구름과 더불어 환계(幻界)에 왔는데

 마음은 밝은 달을 따라 어디로 향하는고.

 나서는 오고, 죽어서는 가는 것, 구름과 달 같으나니

 구름은 스스로 흩어지고 달은 스스로 밝아라.

 

 여기 옮긴 문집은 천경집 三권이며, 이 가운데 이선경위록(二禪涇渭錄)은 조서 후기의 불교계 최대의 쟁점인 의리선(義理禪), 여래선(如來禪), 조사선(祖師禪)에 관한 논술로써 주목을 끄는 글이다. 또한 선() 一변도가 아닌, ()에의 탐구와 염불수선(念佛修禪)을 함께하는 당시의 경향을 살필 수 있어 중요한 조선불교사 연구의 자료가 될 것이며, 천경이 휴정의 후사(後嗣)인 점을 감안하면, 선교일치(禪敎一致)를 설파한 휴정의 법맥이 여기에 이르러 어떠한 종풍을 드날리는가 알 수 있다.

 

 편양당집(鞭羊堂集)

 

 편양(鞭羊)은 스님의 당호(堂號), 언기(彦機)는 스님의 휘()이다. 속성(俗姓)은 장()씨이며 어머니는 이()씨이다. 선조(宣祖) 14(一五八一)에 경기도 안성군 죽산(竹山)에서 태어났다. 11세의 어린 나이로 출가하여 청허(淸虛)스님의 제자인 현빈(玄賓)에게서 계를 받았다. 어려서 출가하게 된 동기를 밝힌 글은 없으나 임진왜란이라는 혹심한 전란(戰亂)이 그의 가정에 변화를 가져와 그것이 출가의 동기가 되지 않았는가 생각할 수 있다.

 현빈 장로에게서 수계한 뒤, 금강산에 머물러 교학을 익히고, 그러는 한편으로는 참선을 닦았다. 임진왜란이 끝날 무렵, 묘향산 서산대사의 회상에 참석하여, 이후 서산대사의 법손(法孫)으로서 입적할 때까지 그 법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편양대사는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아니 하고, 남쪽으로 쉼없이 편력하면서 고승석덕(高僧碩德)을 찾았다.

 그는 금강산 천덕사(天德寺), 구룡산(九龍山) 대승사(大乘寺), 묘향산(妙香山) 천수암(天授?) 등에 머물 적에는 선과 교를 가르쳐 그 명성이 제방(諸方)에 떨쳤다.

 그의 「양을 기른다」는 당호 편양(鞭羊)이 가리키듯 이 중생을 교하하되 양을 기르듯이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 스님은 심산협곡에만 머물지 아니하고 자주 시정(市井)에 나와 교화해야 할 중생과 접하였으며, 때문에 스님의 시문(詩文)이나 선교(禪敎)에 대한 법문은 매우 간결하고 쉬운 것이 특징이다.

 때문에 스님은 심산유곡에 은거하면서 홀로 수도하며, 혼자만이 법열(法悅)에 잠기는 것을 결코 불교의 면목이라 할 수 없다 하였으며, 깨달음을 얻는 것은 스스로의 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중생을 위한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끊임없이 대중속에서 자신을 닦고, 시정(市井)에서 대중을 일깨우는 것으로 본분사(本分事)를 삼았다.

 그의 그러한 뜻은 그의 행적에 적지 않은 일화를 남겼으며, 그 일화는 감동을 가지고 여러 사람에게 전해졌다. 스님은  때로 숯장수를 하는가 하면, 물장수를  했다. 때문에 평양의 인근 사람으로 스님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이같은 스님의 행적은 많은 무리를 불러 모으게 했으며, 대중과 함께 사는 보살행과 도력으로 인하여 스님의 문하에는 수 많은 걸승이 배출되었다. 우리 불교사에서 서산대사의 산맥이 우뚝하고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음 같이, 편양은 그의 법손으로서 서산의 산맥을 더욱 높고 깊고 길게 뻗쳤다고 할만하다.

 인조(仁祖) 22(一六四四) 五월에 묘향산 내원암(內院?)에서 입적하니 세수는 64, 법랍은 53세이다. 문도들이 다비를 하고 영골(靈骨)을 얻어 묘향산과 금강산에 각각 석종(石鐘)을 세우고 안치하였다. 또 두 곳에 비를 세웠는데 금강산의 비명은 백주 이명한(白州 李明漢)이 짓고 묘향산의 비명은 이경석(李景奭)이 지었다. 백주는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의 아들이며, 월사는 서산대사의 비명을 찬했으며, 백주의 아들이? 월사의 손자인 정관(靜觀)은 편양스님의 법사인 풍담 의심(楓潭義諶)의 비명을 찬()하였다. 서산 · 편양 · 풍담의 三대에 걸친 법사(法嗣)의 비명을 월사 · 백주 · 정관 三대가 찬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척불(斥佛)의 조선조 시대에 유생을 대표하는 이들 三대가 비명을 할 수 밖에 없었던 데는 우선 세 스님의 학덕이 높아 그들의 흠모를 받음에도 있으며, 이 세 스님이 모두 시정을 저버리지 아니 한 명안종사(明眼宗師)였기 때문이라고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앞에서 든 바와 같이, 서산의 산맥을 더 높고 깊게 길게 성장시킨 편양의 면모는 매우 주목할만한 것으로 그 예를 들면, 그는 선교의 二문을 설정한 서산의 논리를 발전시켜 교안에 一승 · 二승 · 三승 등 그 우열의 차별을 인정치 않고, 이같은 차별은 오직 중생의 근기에 따른 방편상의 분류라고 설파한 점을 들 수 있다. 따라서 그는 화엄 · 아함 · 방등 · 법화가 중생의 불법에 대한 이해의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그의 혜안으로 알 수 있다. 이같은 그의 사상은 「선교원류심검설(禪敎源流尋劍說)」에서 엿볼 수 있다. 그의 사상을 단적으로 적출(摘出)하면, 그는 사교일리(四敎一里), 교선일문(敎選一門), 三선일미(三禪一味)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조선시대 불교가 한창 쟁론한 의리 선 · 여래선 · 조사선에 대한 스님의 탁견을 발견한다. 즉 그러한 선의 분류는 우열을 두고 논할 문제가 못되며, 그것은 수행인의 근기에 따라 생기는 주관적인 차이일 뿐이며, 객관적으로 볼 때는 원돈문(圓頓門)의 의리선이라든가 격외선이 따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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