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대장경 제82권

무용당집(無用堂集) 서문

oṃ maṇi padme hūṃ 2026. 2. 24. 20:46

 무용당집(無用堂集)

 

 수연(秀演) 지음

 

 무용당 대선사행장(無用堂大禪師行狀)

 

 대사(大師)의 휘()는 수연(秀演)이요, ()는 무용(無用)인데, 멀고 가까운 [1]치소(緇素)들이 다 무용(無用)을 헌호(軒號)로 일컬었기 때문에 그대로 호()를 삼았다.

 속성(俗姓)은 오()씨니 용안(龍安) 사람이다. 고려 태위 문양공 연총(高麗太尉文襄公延寵)의 후예로서 세대(世代)가 끊이지 않았다.

 아조(我朝)에 이르러 그 증조(曾祖) 하몽(下蒙)은 벼슬이 통훈대부 행정의(通訓大夫行?) 및 무안(務安) 등 현감(縣監)에 이르렀고, 그 조부 응정(應鼎)은 벼슬이 통정대부 행순천부사 증가선대부 한성좌윤(通政大夫行順川府使 贈嘉善大夫漢城左尹)에 이르렀으며, 그 아버지 섬무(暹武)는 절행벽단첨사(節行碧團僉使)였다. 그 꿈에 누른 문채가 있는 큰 벌레가 공중에 서리어 조금 돌다가 도로 떨어져서는 집을 몇 바퀴 돌았다. 그리하여 곧 아기를 배어 [2]순치(順治) 八년 신묘 三월 十三일 경인에 탄생하였다.

 대사는 나자부터 이상한 데가 있어 몸이 조촐하고 머리 끝이 우뚝히 높았으며, 어려서는 슬기로우면서 말이 적었다.

 八세 때에 비로소 서사(書史)에 들어갔는데 한 번 읽고는 곧 돌아앉아 외오되 그 뜻을 남김 없이 모두 다 알았었다.

 아아, 十三세 때에는 갑자기 고비(考妣)를 모두 잃고 오직 형만을 의지하였으나, 곤궁한 중에서도 三분()五 전()과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모두 모아 두루 읽었지마는 조금도 심장적구(尋章摘句)하는 따위의 짓거리가 없었는데, 그 때부터 그 이름이 사방에 퍼졌었다.

 十九세 때에 덧없는 인생이 잠깐임을 관찰하고 집을 떠나려는 큰 뜻을 내었다. 그리하여  하루 아침에는 그 형에게 알리지도 않고 몸을 숨겨, 멀리 남방으로 향해 가다가 우연히 조계산 송광산(曹溪山松廣寺)로 들어가 혜관 노사(惠寬老師)에 의해 머리 깎고, 그 산의 혜공(慧空) 대사에 의해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대사는 몸이 장대(長大)하고 얼굴은 크고 방정하며 도량(度量)이 넓어 남의 장단(長短)을 말하지 않았으며 오직 도()만을 따르면서 명리(名利)를 좋아하지 않고, 문을 닫고 묵묵히 앉아 참선하고 있었다.

 二十二세 때에 그 양사(養師)가 말하기를,

 「옛날부터 대도(大道)를 통하고 심원(心源)을 깨친 이는 다 선교(禪敎)를 쌍행(雙行)하였는데, 오직 선문(禪門)만을 전수(專修)하는 것이 어찌 이치에 옳겠는가?

하였다.

 대사는 이에 번연(翻然)히 뜻을 고치고 먼저 침굉(枕肱)의 문을 두드렸다. 그리하여 현음(玄音)을 한 번 들으면 두 번 되풀이하지 않아도 잘 이해하였다. 그러므로 침굉은

 「원돈(圓頓)의 법계(法界)가 모두 그대에게 있구나.

하였다.

 대사는 이에 옷자락을 떨치고 백운산 백운암(白雲山白雲庵)으로 돌아가서는 一년 동안 선정(禪定)을 닦으면서 혜()를 고루었다.

 二十六세 때에는 침굉의 부탁을 받고 조계산 은적사(曹溪山隱寂寺)로 가서 백암(柏庵)을 뵈었다. 백암은 대사를 한 번 보자 매우 기특히 여겨 그 문도(門徒)들에게

 「이 사람은 고현(高賢)의 자리를 빼앗고 금선(金仙)의 문()을 통할 것이다」하였다. 그래서 문도들은 다 대사를 존경하였다.

 대사는 이로 인해 거기 머물렀는데 백암이 경전의 뜻을 물어 보면 조금도 틀림이 없었을 뿐 아니라 새로 깨친 것이 더욱 많기 때문에 몇 해 동안에 모든 장경(藏經)을 다 읽었으며, 용문산(龍門山)으로 옮겨 가서는 다시 내관(內關)을 연마(鍊磨)하였다.

 경신년(一六八0) 가을에는 선교(禪敎)의 참학(參學)들로서 먼저 금화동 신불암(金華洞新佛庵)에 가서 살던 사람들이 대사를 간절히 청하였으므로, 대사는 그 인연을 따라 부임(赴任)하였는데, 신참(新參)들도 또한 많았다. 그래서 그 절이 너무 비좁음을 꺼려 다시 본사(本寺)의 미타전(彌陀殿)으로 옮겨 가서 머물렀다.

 임술년(一六八二년) 가을에는 선암사(仙岩寺)의 청을 받아 부임하였고, 계해년(一六八三년) 여름에는 또 송광사(松廣寺)의 청을 받고 부임하였는데 집정(?)하는 이가 더욱 많았으므로 자신의 공부에 큰 지장이 되었었다.

 그래서 어느날 밤에는 몰래 도망쳐 희양산(曦陽山)의 옛날 살던 백운암(白雲庵)으로 가서 혜()를 고루기에 더욱 힘썼다.

 또 이듬해 봄에는 팔영산 제칠봉(八影山第七峰) 밑으로 가서 한 터를 얻어 풀을 베어 내고 집을 짓고는 선관(禪關)을 오로지 닦으매 혜해(慧解)가 모두 빛났었다.

 병인년(一六八六년)에는 또 대중의 청을 물리치기가 어려워 본사의 능인전(能仁殿)으로 옮겨 가 머물렀다.

 무진년(一六八八년)에는 조계산으로 가서 백암을 찾아 뵙고는 화엄소초(華嚴疏鈔)를 받아 자세히 살펴보고 연구하여 진수(眞髓)를 모두 얻었다.

 기사년(一六八九)년 봄에는 백암이 증광사(證光寺)로 가서 화엄연의(華嚴演義), 대명법수(大明法數)와 간정기(刊定期), 정토서(淨土書) 등을 출판하여 인천(人天)의 눈을 열어 주려 할 때에 대사도 그것을 도왔다.

 또 임신년(一六九二년) 봄에는 선암사(仙岩寺) 선임(禪任)이 백암을 청해 화엄회(華嚴會)를 베풀자 四부 대중이 다투어 갔는데 대사도 그를 따라갔다.

 그 해 겨울에 백암이 방호(方壺)로 들어가자 대사는 본사의 창파각(滄波閣)으로 옮겨 살았는데 대중이 백여명이나 되었다.

 갑술년(一六九四년) 봄에는 청을 받아 송광사 은적암(隱寂庵)에 있었다.

 기묘년(一六九九년)에는 청을 받아 동산(桐山)으로 가서 머물렀다.

 경진년(一七00) 가을 七월에 백암이 지리산 신흥사(神興寺)에서 입적(入寂)하자 부고(訃告)를 받고 달려가 곡()하고, 초七일에 화욕(火浴)한 뒤에 대중이 그 강석(講席)을 이어받기를 청하였는데, 대사는 겸양하고 승낙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중의 청이 더욱 견고하였으므로 비로소 개당(開堂)을 승낙하였다.

 이듬해 봄에 다시 칠불암(七佛庵)에 들어가자 선려(禪侶)와 의학(義學)들이 더욱 많이 모여왔다. 그래서 낮에는 강의하고 밤에는 참선하면서, 남을 지도하고 자기를 다스리기에 밤낮으로 게으르지 않았다.

 갑신년(一七0四년) 봄에는 갑자기 대중을 물리치면서 말하기를

 「부질없는 지껄임이 어찌 전심(專心)」으로 염불함 만하겠느냐?

하고는 곧 옷자락을 떨치고 용문산(龍門山)의 은봉암(隱峰庵)으로 가서 살았다. 그로부터 대중을 가르치기도 하고 걷어 치우기도 하여 아무 표준이 없었으나 학도들이 대사를 따르는 것은 마치 온갖 새들이 날라가는 난새()를 따르는 것과 같았다.

 경인년(一七一0) 봄에는 산양(山陽)의 관흥(關興)으로부터 조계산의 옛절로 돌아와 날마다 강송(講誦)하는 여가에는 그 절 동쪽 시내 위에 손수 대()를 쌓고 정자를 짓고는 이름을 수석정(水石亭)이라 하였다. 그리고 그 정자 이름을 해석하였는데 간단히 말하면

 「돌은 견고하면서 고요하나니 나도 이로써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지니고자 하며, 물은 흐르면서 맑나니 나도 만물에 응함으로써 막히지 않고자 한다.」하였다. 이것은 그 때 그 때, 형편을 따라 놓았다 잡았다 하면서 자유롭게 사물에 응하는 길이니, 과거의 빛을 잉태하고 뒤에 오는 이의 모범이 되려는 것이다.

 기해년(一七一九년) 봄에 영호(嶺湖)의 모든 절에서 남의 사범이 되고, 또 누구라 이름할 만한 三백여명이 여기 모여 화엄경과 선문(禪門)의 강의를 청하였다. 그러나 대사는 사양하되

 「내가 바르지 못한데 어떻게 남을 바?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리하여 사양이 더욱 견고하였으나 청이 더욱 간절하였으므로, 드디어 법좌(法座)에 올라가 불자(拂子)를 휘두르면서 오묘한 뜻을 모두 설파(說破)하였다. 낙낙(落落)한 원음(圓音)이 중중(重重)으로 서로 빛나 거기 모인 대중으로서 습복(習伏)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이것이 어찌 비인(秘印)을 받아 차고 임제(臨濟)의 종풍(宗風)을 크게 드날린 것이 아니겠는가.

 아아, 그 해 늦여름에 대사는 조금 앓으면서 앉았기도 하고 누웠기도 하다가 十월에는 양공(良工)을 불러 미타삼존 금상(彌陀三尊金像)을 개금(改金)하였다. 그리고 十七일에는 정오가 되자 전심으로 염불하면서 왼발을 오른 무릎 위에 얹고 돌아가시니, 보령(報齡)은 六十九요 좌하(坐夏)는 五十一이었다.

 초七일 임술에 그 절 백호(白虎) 밖에 있는 오도치(悟道峙) 밑에서 다비(茶毗)에 붙이니, 치소(緇素)들이 모두 그 장례에 모였는데, 그 상감(喪龕)의 의식에 있어서 번여모정(?)의 성대함이 일찌기 없었었다. 대방(大方)이 출발할 때에는 상서로운 구름이 갑자기 일어나고 산의 숲들이 모두 빛이 변했으므로 보는 이들이 다 이상히 여겼었다.

 이듬해 봄 경자년에 그 문인(門人) 낭형(朗炯) 등이 돌을 쪼아 그 절 백호(白虎) 밖 고봉(高峰) 언덕에 탑을 세우니 거기는 미로 선사(先師)의 곁이다.

 그 당시의 진신(?)으로서 대사와 친하지 않은 이가 적었지마는 그 중에도 영상 이 광준(領相李光俊), 대사성 최 창대(大司成崔昌大), 참판 이 진유(參判李鎭儒), 교리 임 상덕(校理林象德), 최 양양 계옹(崔襄陽季翁), 김 삼연 창흡(金三淵昌洽), 황 순천 익재(黃順天益再) 등이 가장 친하였다.

 대사는 선()하는 여가에 게송(偈頌)을 잘했고, 혹은 산문도 허다하지마는 그 중에서 정요(精要)한 것 약간의 편을 뽑아 활판(活板)에 붙인다.

 그 수업(受業) 제자들로서 각각 그 피, , (皮肉髓)를 얻어 남의 스승이 된 자와 바윗굴 속에 깊이 숨어 혼자 선()을 닦는 자들도 많지마는 번거로워 그 이름을 다 적지 않는다.

 그 중에도 탄() 같은 이는 일찍부터 대사의 곤역(閫域)에 놀면서 자주 그 경해(?)를 받들었으니 이로써 이 도()에 들어온 사람은 모두 귀를 쥐고 손바닥을 가리키면서 가르쳤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은혜는 천지와 같고 정은 골육(骨肉)보다 더한 것이니, 은혜와 정이 지극하면 비록 금수(禽獸)라도 죽음으로 그 덕을 갚으려 할 것이다. 그러므로 눈물을 닦는 여가에 세상 사람들이 다 함께 보고 들은 것을 주워 여기 출판하면서 삼가 이 행장을 쓴다

 옹정(雍正) 三년(一七二五년) 갑진 남월 일



[1], 치소(緇素) ·· 緇는 염의(染衣), 즉 승려. 素는 흰 옷. 즉 속인.

[2], 순치(順治)8년 ·· 서기 一六五一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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