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대장경 제82권

천경집(天鏡集) 중 권

oṃ maṇi padme hūṃ 2026. 3. 2. 00:06

 천경집(天鏡集) 중 권

 

 해원(海源)

 

 석왕사 법당중수(釋王寺法堂重修) 및 육대보살 금상조성기(六大菩薩金像造成記)

 

 설봉산(雪峰山)의 석왕사(釋王寺) 법당(法堂)을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 하고 그 대웅전 안에는 석가(釋迦), 미륵(彌勒)약사(藥師) 등 세분 여래(如來)님의 금색 좌상(坐像)을 모셨는데 三백년이나 되었으므로, 대웅전은 허물어지고 불상은 퇴색하였다. 그래서 이 절에 살면서 이 부처님네를 모시는 사문(沙門)으로서, 지금까지 이 절을 수리하고 이 부처님을 개금(改金)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지만 다만 그 규모를 따르고 그 제도를 지켰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이 절의 행정 장로(行淨長老)가 처음으로 이 영리(營理)를 발원(發願)하고 널리 시연(施緣)을 모집하고는 곧 관서(關西)의 각민 화상(覺敏和尙)을 청해 도규정(都糾正)의 역사를 맡겨 크게 넓혀 개척하여, 一년이 못되어 역사를 마치니, 그 화려하고 웅장함이 모든 총림(叢林)의 으뜸이 되었다. 각만이 행정(行淨)에게 말하기를,

 「대웅전은 아무 흠이 없지마는 부처님에게는 아직 미비한 점이 있다. 대개 부처님에게 보살의 보익(輔翼)이 있는 것은 사람에게 팔이 있고 새에 날개가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람에게 팔이 없으면 무엇으로 활동하며, 새에게, 날개가 없으면 무엇으로 날겠으며, 부처님에게 보익이 없으면 무엇으로 가르치겠는가? 상제(像制)를 보면 부처님에게 반드시 좌우의 보익이 있는 법인데 지금 여기만 그 상설(像設)이 없어 되겠는가? 자네는 다시 계획해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고, 드디어 二천동()을 내어 스스로 그 첫째 단월(檀越)이 되었다.

 그리하여 정()이 스스로 화주(化主)가 되어 힘을 다해 주선하여 비용이 넉넉하게 되었다.

 또 영남의 스님 여찬()을 청하여 조채(彫彩)의 책임을 맡겨 여섯 보살의 진용(眞容)을 그려 세 분 여래님의 좌우에 엄연히 벌려 모시니 마치 영산(靈山)의 옛날 대회(大會) 같았다.

 이것은 다 위의 세 상인(上人)이 부지런히 힘쓴 것으로서, 그 三인은 각각 그 장기가 있었으니, 혹은 [1]반수(?)의 기교보다 공교하고, 혹은 고장(顧張)의 기예보다 교묘하며, 혹은 부처님을 받드는 돈독한 정성으로 그리고, 새기는 정성과 어울려 마음과 생각을 합하여 이 연화정계(蓮花淨界)의 일대인연(一大因緣)을 맺게 되었으니, 그 높고 큰 공덕은 수미산과 같다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일이든 주관(主管)의 수응(酬應)이 없으면 그 일은 이뤄지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또 택흡(擇洽) 화상이 전후를 주관하고 시종을 수응하여 온갖 일을 준비하고 모든 사무를 처리하게 하였으니 그 공인을 어찌 이상의 三인보다 못하다 하겠는가. 여기서 비로소 三은 一을 힘입고 一은 三과 같음을 알 수 있으며, 또한 三 여래와 六 보살이 영계(靈界)의 명명(冥冥)한 속에서 목차(木叉), 선재(善財) 등 四개의 대사리(大舍梨)를 내려보내어 각각 그 一을 담당하여 그 공을 이루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어찌 이처럼 그 신조(神助)와 영좌(靈佐)가 서로 도울 수 있었겠는가?

 돌아보면 빈도(貧道)는 국외(局外)에 있는 사람으로서 그 수에 들지 못하지마는 위의 四 상인(上人)의 역사로 인해 무량한 성거(盛擧)를 보게 되었으니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이에 가만히 마음으로 느낀 것은, 불전이 무신년에 이루어졌고 보살상은 무오년에 이루어져 다 같은 무()년이라면 이것은 진실로 이상한 일이며, 나아가서는 평강 보월사(平康寶月寺), 황룡산(黃龍山)의 극락암(極樂庵) , 이 세 곳의 관음상이 한꺼번에 이루어졌으면서도 모두 한 무년에 되었으니, 그 묵계(墨契)의 이치도 저절로 있어서 기약하지 않고도 그렇게 된 것인가?

 그러나 이루어졌다 허물어지는 것은 바로 천도(天道)의 자연이요 허물어졌다 이루어지는 것도 또한 사람의 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루어지고 허물어지는 그 사이에 하늘과 사람의 서로 합함이 있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여기 위 四인의 공은 이룸이 있었다 할 수 있지마는, 어찌 다른 날에 그 이룸이 또 허물어짐이 될는지 누가 알겠는가? 만일 뒷 사람들로 하여금 위의 四인의 마음을 본받아 그것이 허물어지는대로 곧 계속해 이루게 한다면 그것이 이루어지고 허물어짐이 없음이 천지와 더불어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니, 이에 이 기문을 쓰는 것이다.

 

 설봉산 심적암 광흥루 창건기(雪峰山深寂庵廣興樓創建記)

 

 이 암자는 오래 전에 창건 되었으나 종루(鍾樓)가 거기에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혹 불사가 있을 때에는 의관과 위의를 갖추어 정돈한 용상(龍象)의 법사들이 한데에 앉게 되었으니, 그것이 또한 오랜 유감이었다.

 지금 신매(信梅), 삼장(三藏), 서하(瑞荷) , 세 상인(上人)이 벽해(碧海)의 좁쌀과 삼림(森林)의 수()를 모아 암자 앞에 누각을 세우고 이름을 광흥(廣興)이라 하였으니 그것은 만행(萬行)을 널리 닦고 자비를 일으켜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뜻이다.

 또 암자의 이름이 심적(深寂)이니 그것은 문수(文殊)의 지경(智境)으로서 서리와 눈이 하늘에 가득 차고, 누각의 이름이 광흥(廣興)이니 그것은 보현(普賢)의 행문(行門)으로서 파랑과 노랑이 땅에 가득한 것이다.

 이 암자에 사는 스님네가 지혜에 머물고 누각에 오르는 사람들이 행으로 논다면 이 누각을 세우고 이름을 붙인 뜻을 거의 저버리지 않을 것이며, 지혜의 달이 하늘에 빛나고 마음의 꽃이 땅에 가득하다면 또한 문수와 보현의 경역(境域)을 반드시 밟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암자의 「심적(深寂)」과 누각의 「광흥(廣興)」이라는 뜻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이 누각의 형세는 표묘하고 영롱하여 저 담화(曇花), 법운(法雲)과 서로 겨루고 있다. 이 누각에 오르면 멀리는 백리의 상마(桑麻)와 천촌(千村)의 도리(桃李)요 가까이는 흰 돌, 차가운 못과 우거진 나무, 짙은 숲이니 이것이 이 누각의 대관(大觀)이다. 그리하여 이제는 저 용상들이 한데 앉지 않게 될 것이며, 이 곳을 동경하여 노는 사람들도 또한 여기서 지팡이를 멈추고 어깨를 쉬게 되는 편리함을 얻게 될 것이니, 이 암자에 있어서 이 누각은 마치 용에 구슬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세 상인의 공은 이 누각과 함께 장구할 것이요, 이 누각도 또한 산과 함께 장구하게 되어 진묵겁(塵墨劫)에 멸하지 않을 것이다.

 내 비록 졸문(拙文)이나 저 장로들의 은근한 뜻을 아름다이 여겨 그 대강을 간단히 적는 것이다.

 

 석왕사 관음전 중창기(釋王寺觀音殿重創記)

 

 때에는 원근(遠近)이 있고 사물에는 흥폐가 있는 것이다. 만일 그 남상(濫觴)을 상고하고 그 [2]복궤()를 기록한다면, 이 절은 홍무(洪武) 十七년 태조 대황이 용잠(龍潜)으로 계실 때 창건한 것이요, 이 당()도 또 그 때에 세운 것이니, 그렇다면 그것은 오래 된 것이며, 그 흥폐도 또한 한 두 번이 아닐 것이나 기록이 없어 자세히는 알 수 없는 것이다.

 가정(嘉靖) 三十년 신해(辛亥) 봄 병자에 화재를 만났으나 그 해에 복구하였고, 또 숭덕(崇德) 六년 신사(辛巳) 늦봄에 다시 화재를 만나 천년의 보기(寶基)가 하루 아침에 초토가 되었으니 그 기수(氣數)가 어찌 이처럼 불행했겠는가?

 탄욱(坦旭) 상인이 복구하기 시작하여 그 해 가을에 준공하고 지금의 옹정(雍正) 九년 신해(辛亥)에 간준(侃俊) 상인이 재물과 공인(工人)을 모아 봄에 시작하여 가을에 준공하니,이것이 이 당의 남상과 복궤의 시종이다.

 때에는 비록 원근이 있으나 그 모두가 같은 때로서 신? (辛亥)년이니, ()이여, 신이여, 그것은 곧 이 당의 흥폐의 어머니이다. 그것은 금()에 위치하여 순환이 무궁하나니, 그렇다면 나는 이 당의 흥폐로 또한 무궁하리라 믿는다. 그리고 이 당을 청련(靑蓮)이라고 이름한 것은 이 당에 사는 사람이 六근()의 적을 죽이고 一심()의 거울을 갈아서, 五온()의 악마를 비추고 우러러서는 九품()의 연계(蓮界)를 밟을 수 있다는 뜻인가 한다.

 아아, 이 당의 흥폐는 곧 기수(氣數)의 성쇠(盛衰), 기수의 성쇠는 또한 도의 높고 낮음에 있는 것이니 만일 사람이 도로써 여기 산다면 기수의 나쁨을 거의 소멸하여 천지와 함께 시종(始終)할 것이다.

 

 석왕사(釋王寺)의 五백 나한(羅漢)과 금가사(錦袈娑)의 개조기(改造記)

 

 만엽(萬葉)의 큰 기초는 三연()의 길몽(吉夢)에 근본하였고, 천추의 보배 역사는 五백 성자(聖慈)의 도움을 입은 것이니, 五백 성인이 여기 오신 자취가 어찌 우연이겠는가.

 성조(聖祖)께서 용잠(龍潜)으로 계실 때 초막의 진인(眞人)으로서 토굴의 신승(神僧)을 만나 부처의 하늘에 정성을 다 하고 복덕의 땅에 마음을 기울여 해양 광적사(海陽廣積寺)의 五백 나한을 배에 싣고 와서 이 산에 봉안하시고는 재를 베풀고 기도하셨다. 등극(登極)하신 뒤에는 이내 임궁 범찰(琳宮梵刹)을 창건하시어 백 八인의 운납(雲衲)을 수용하고, 또 비단 가사를 지어 五백 나한에게 입히시니, 영취(靈鷲)의 도량에 어렴풋하고 천태(天台)의 면목에 방불하였다.

 위대하여라, 옛날의 초막이 나라()로 화하였고 옛날의 토굴이 절로 화하였으니 그 초막을 화하여 나라가 된 것을 생각하면 실로 무학(無學)의 공을 힘입은 것이요, 토굴이 화하여 절이 된 것은 또한 성조(聖祖)의 덕을 힘입은 것이다.

 또 절을 세움이 오래 된 것과 같이 나라를 세움도 그와 같다. 그러므로 대웅전(大雄殿)은 세 번 흥폐를 겪어 물이 새고 퇴락하였으며, 비단 가사는 한 번도 바꾸지 못해 티끌을 뒤집어 쓰고 다 헤어졌으니, 성조의 자취가 거의 멸하게 되었었다.

 그런데 여기 행정(行淨) 장로는 마음이 녹녹하지 않고 기운이 쟁쟁함을 안은 스님이다. 옹정(雍正) 황원(黃猿=戊申) 봄에 이르러 법당을 중수하려고 오랫동안 내사(內司)에 글을 올려 상방(尙方)의 내림을 많이 얻었고, 또 도백(道伯)도움을 보태어 비로소 법당을 짓는 근부(斤斧)의 큰 역사를 일으켰다.

 또 가사를 고쳐 지으려고 서울에 올라가 자균니(慈均尼)에게 청탁하고, 자균니는 다시 나인 철애(內人鐵愛)에게 알렸으며, 철애는 또 대내전(大內殿)에 아뢰었으니, 선왕(先王)의 자취가 없어짐을 개탄하고 후세의 인연을 도모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五색의 갖가지 비단 三천 여척과 七보의 패물 영락 五백 여개와 갖가지 소용 되는 것을 모두 넉넉히 내리셨다.

 그리하여 八방의 고선(高禪)을 청하고 가사회(袈娑會)를 양주 운수사(雲水寺)에 베푸니, 운수사는 곧 선왕이 복을 빌던 절이다. 백 八인을 한정하여 한 달 안에 바느질을 마치고 이 절에 돌아오니 곧 기유년 여름이었다.

 이에 대웅(大雄), 응진(應眞), 二전(殿)의 불상 六존()과 천자(天子)의 원불(願佛)인 주상(鑄像) 三존과 五백 성상도 명령하여 다 개금(改金)하게 하였으니, 어찌 천태(天台)의 외로운 달이 거듭 밝고 영취(靈鷲)의 남은 바람이 다시 분 것이 아니겠는가. 나아가서는 비단 일산 두 개, 병풍 두 개, 유리 산호잔 등, 갖가지 보배 완구(玩具)는 이루 다 셀 수 없었다. 이런 일은 천고에 드문 일이니 어찌 붓이나 말로 다 형용하여 후세에 전하겠는가.

 또 기이한 자취가 있으니, 말하자면 옛날 만력(萬曆) 무신년에 일찌기 이런 일이 있었는데, 그 동안이 무신년이 두 번 지난 백 二十 一년이다. 때는 비록 원근이 있으나 모두가 다 무신년이니 어찌 기이한 일이 아닌가. 선왕의 희유한 자취를 계승하여 후대의 태평한 업을 힘쓴 것은 오직 이 뿐이다.

 또 성화(聖化)가 여기에만 미친 것은 행정 장로의 지극한 정성이 아니면 어찌 이렇게 될 수 있으며, 무학 화상의 부촉이 없이 어찌 이렇게 될 수 있었겠는가. 옛말에 「지인(至人)은 무공(無功)」이라 하였지마는 이 스님의 공은 그래도 기록할 만한 것이다.

 

 덕원 명적사 주종기(德原明寂寺鑄鍾記)

 

 종의 형체는 둥글고 속이 비며 소리는 웅장하면서 맑고도 멀리 간다.

 인계(人界)에 울리면 들음을 돌이켜 소리를 듣고 진근(塵根)을 벗어나 원통(圓通)을 얻는 이가 강가의 모래처럼 셀 수 없으며, 지부(地府)에 두루 미치면 괴로움을 쉬고 고생을 멈추어 업의 바다를 벗어나 정역(淨域)에 오르는 자가 티끌 수처럼 무궁하다. 그러므로 그 물건의 작용은 위대한 것이다.

 화마년(火馬年=丙午年)에 본부(本府)의 김 순철(金順哲)과 본사의 스님 체련(體連)이 재물을 거두고 공인(工人)을 불러 처음으로 이 종을 만들었으나, 형상이 비뚤어지고 소리가 맑지 못해 빈 누각에 버려진지 十二년이 지났었다.

 토마년(土馬年=戊午年)에 이르러 거사 쌍념(居士雙念)이 촌사(寸絲)를 빌고 편금(片金)을 거두어 이 종을 다시 만들었다. 형상이 원만하고 치면 울리어 그 소리는 성루(星樓)를 떨치고 그 메아리는 [3]운구(雲衢)에 사무치니 여러 개의 여우 가죽을 모아 갖옷()을 만들고 모든 냇물을 끌어 바다를 이루었다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무게는 五백근인데 몇 백년이나 전해 내려왔는지 알 수 없다.

 또 초창(初創)의 공과 중주(重鑄)의 공에 있어서 그 경중(輕重)은 어떠한가. 전공(前功)의 폐()를 지내지 않으면 금공(今功)의 흥()은 나타나지 않으며, 금공을 말미암지 않고는 전폐(前廢)를 일으킬 수 없는 것이니, 흥폐는 서로 따르고 전후가 서로 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후의 흥폐로써 공의 경중을 따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 전후의 공이 아울러 내세에 까지 전하게 됨을 상상할 수 있다. 나는 글을 못하는 자인데 남명 붕 선사(南溟鵬禪師)가 내게 기문을 청하였다. 나는 굳이 사양하였으나 선사의 청이 간절하였으니, 내 어찌 글을 못한다 하여 굳이 거절해서 되겠는가. 붕선사의 말에 의하여 전후의 공을 적으면 되는 것이니, 이에 써서 기문으로 삼는 것이다.

 

 석왕사 관응당기(釋王寺管應堂記)

 

 옛날에 이 집 이름을 관응(管應)이라 한 것은 잘못을 바로잡아 일에 응한다는 뜻이다.

 성조(聖祖)께서 용흥(龍興)하실 때에 창건하여 그 흥폐(興廢)가 한결같지 않았었다. 정덕(正德), 만력(萬曆), 숭정(崇禎) 三대() 사이에 한 번 중수하였고, 강희(康熙) 신사년에 이르러 그 주지 염탁(染濯)이 모든 일을 오로지 맡아 고쳐 세웠으니, 이것은 곧 전후 흥폐의 대강이다.

 또 옹정(雍正) 三년 을사에 보월산인 밀엄(寶月山人密嚴)이 이 절 주지로 부임하여 항상 탄식하기를

 「이른바 관응당이란 잘못을 조사해 바로잡아 법으로 다스리는 곳인데, 대웅전(大雄殿) 곁에 너무 가까이 있으니, 이것이 옮기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의 첫째이다.

 또 이른바 운헐당(雲歇堂)이란 사해(四海)의 운납(雲衲)들이 쉬는 곳인데 옛날에는 지었지마는 요새 인심은 옛날과 달라 승속간의 범부들이 빈 방에 모여서는 혹은 서로 싸워 죽음에까지 이르며, 혹은 도둑질로써 물건의 손해를 끼치는 폐단이 있으니 이 또한 오래 둘 수 없는 이유의 그 둘째이다.

 또 손님을 맞이하는 별관()이 없기 때문에 크고 작은 사신들의 행차가 절에 들게 되면, 대접하는 음식을 승주()에서 만들게 되어 어육(魚肉)의 비린내가 도량에 가득 차니, 이것은 더구나 별관이 없을 수 없는 이유로서 그 세계이다」

하였다. 이상의 세 가지 불가한 것을 개탄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갈려 가고 말았다.

 그러다가 이듬해 정미년 봄에 또 그는 이 절의 선종(禪宗)으로 부임하면서 이전의 소원을 따라 굳이 주장하여 여기에 터를 정하였다. 그런데 그 지형이 위는 높고 밑은 낮아 마치 벼랑 같았으므로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인부 二천 三백여명이 돌을 쌓아 뜰을 만드니 높이가 몇 길이었으므로 흙을 져다 메우니 두께가 十척이나 되었다.

 그리하여 이전의 관응, 운헐의 두 당을 합해 방 하나를 만들고는 아래 위를 갈라 영빈관(迎賓館)을 만들고 중간의 빈 곳을 규정헌(糾正軒)으로 하였다. 그리고 행랑을 크게 트고 지대가 없이 쪽 곧으니, 그 건축의 장려함이 그보다 뛰어난 것이 없었다. 스님에게 있어서는 손님을 맞이하는 예의가 있게 되고 손님에게 있어서는 흥취를 풀 경치가 있게 되었다.

 어찌 그 뿐인가. 묵은 손님을 보내자마자 또 새 손님이 오며, 위 별관의 자리를 걷자마자 아래 별관에 또 자리를 펴게 되어 맞이하고 보내는 날이 끝이 없으니, 이 당의 쓰임새가 실로 이와 같았다.

 주인은 시비(是非)가 없는 몸인데 시비가 있는 이름을 얻으면 혹은 기뻐하면서 사례하고, 혹은 성내면서 꾸짖게 되니, 무릇 주인의 풍도가 어찌 이와 같아서야 되겠는가. 이에 주지는 세 가지 병이 없이 백세의 공을 남기게 되었으니, 지팡이를 던져 물을 끊고 한 손으로 하늘을 받드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옛날에 월주(越州)의 탑을 세운 사람은 三생을 지나서야 이루었고, 지금 이 집에 사는 사람은 一생 동안 걸려 지었으니 그 궤도는 다르나 돌아가는 곳은 같은 것이다. 더구나 임천(林泉)의 뛰어남에 있어서는 오직 이 당에 오르는 사람의 보는 눈에 달렸기 때문에 여기서는 쓰지 않고, 그 흥폐의 대강만을 적는 것이다.

 

 덕원부 반룡산 천주암 신건기(德原府盤龍山天柱庵新健記)

 

 춘성부(春城府)에 한 큰 신사(信士)가 있으니 그 성은 맹()씨요 이름은 천덕(天德)이다. 그는 산업을 경영하지 않고 날마다 미타(彌陀)를 외우면서 세속에 있으면서 세속에 섞이지 않고 티끌 속에 살면서 티끌에 물들지 않으니, 이른바 세속을 뛰어나고 티끌을 벗어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백구(白狗=庚戍)년 봄에 조 일남(趙日男), 홍 여상(洪呂尙) 등과 더불어 일심으로 노력하여 산수 사이에 큰 역사를 시작해 한 암자를 짓고 그 이름을 성불(成佛)이라 하였다. 그러나 땅이 영()하지 않고 신()이 보호하지 않아, 중이 흩어지고 절도 또한 폐사(廢寺)가 되어 전공(前功)이 매몰하게 되었으니 실로 가석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적룡(赤龍=丙辰)의 해에 형제봉(兄弟峰) 밑으로 옮겨 세우니 그 봉은 반룡(盤龍)의 남은 맥()이므로 그 산을 반룡산이라 하고 그 암자를 천주암(天柱庵)이라 한 것이다. 무엇 때문에 천주암이라 했는가. 하나는 봉의 형상을 취한 것이요, 또 하나는 사람의 이름을 취한 것이다. 봉의 형상인즉 위로 동남쪽의 하늘을 떠받친 것이 꼭 [4]여와(女媧)가 돌을 단련하여 하늘을 깁는 형상이요, 사람의 이름인즉 이룬 사람의 이름이 천덕(天德)이기 때문이다. 하늘이 그 덕을 주어 이 암자를 이룬 공덕을 전하여 천주와 더불어 썩지 않기 때문에 천주라 한 것이니 참으로 깊은 뜻이 있는 것이다.

 이 암자가 이루어지자 내게 그 기문(記文)을 부탁하므로 나는 사양하다 못해 다음과 같이 이 글을 쓰는 것이다.

 석원(釋苑)의 사람이 범찰(梵刹)이라는 말을 듣고 서교(西敎)를 숭상한다는 것은 원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공문(孔門)의 선비로서 선우(禪宇)를 짓고 불도를 존중하는 것은 실로 드문 일이라 할 것이다.

 또 보이는 것은 난간 밖의 푸른 산이요 들리는 것은 뜰 아래 푸른 물이다. 이 암자에 사는 스님으로서 이것을 보고 듣고도 그 소리와 빛깔의 경계에 빠지지 않고 심지(心地)가 안한(安閑)하면 유심(惟心)의 정토(淨土)를 밝게 통달할 것이며, 정토가 곧 이 암자요 이 암자가 곧 정토이어서 자성(自性)의 미타(彌陀)를 환히 깨칠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이룬 자의 공을 알아 연대(蓮臺)를 밟을 수 있을 것이요, 그렇지 못한다면 이룬 자의 공을 모르고 올빼미가 썩은 쥐고기를 쪼이고 개가 마른 뼈를 씹으면서 주림의 불()만을 더할 것이다. 여러 형제들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아아, [5]상산(商山)의 연하(烟霞)[6]부춘(富春)의 영수(靈邃)도 엄릉(嚴陵)의 뛰어난 발자취와 사호(四皓)의 높은 발자국이 아니었?면 응당 쓸쓸할 뿐이었을 것이다. 지금 이 암자의 터도 이 사람을 만나 세상에 나타났으니 하늘이 아끼고 땅이 숨겨 두었다가 이 사람을 기다렸던 것인가.

 나는 세속을 뛰어나고 티끌을 벗어난 선비와 본래부터 친교가 있었기 때문에 굳이 사양하지 못하고 이 기문을 쓰는 것이다.

 

 석왕사 명부전 중창기(釋王寺冥府殿重創記)

 대개 청탁(淸濁)의 본체가 이미 나타나매 선악의 근원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九천() 위에서 선악과 상벌의 조목을 열고 十지() 밑에 윤회와 응보의 법이 있는 것은 염왕(閻王)이 일어난 까닭이 되고 상제(上帝)가 생긴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인간에도 염라전(閻羅殿)을 세우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악을 끊고 선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이다. 절을 세움과 나라를 세움이 다 같이 오래 되었으므로 이 명부전도 세운지 오래 되었다. 그래서 용마루와 들보는 기울어 위태하고 서까래와 처마는 제 자리를 벗어났다. 그러므로 거기 사는 스님이나 지나가는 나그네가 모두 개탄하였던 것이다.

 운곡자 천건(雲谷子天建) 대사가 기()의 한 털을 거두고 용()의 조각 껍질을 모아 그 묵은 제도를 고쳐 새 모양을 보태었으니, 퇴락한 것을 다시 수리하고 끊어진 노()를 다시 이었다 할 수 있다. 응진 상인(應眞上人)이 五채()를 갖추어 三간()에 그림을 그리니 솟은 날개가 날으는 것과 같아 눈을 돌리면 반드시 눈부시며, [7]쌍오(雙五)의 염왕(閻王)이 그 안에 섰으니, 인간의 선악과 인과를 맡아 살피는 자로서 어찌 이 명부전을 떠나랴. 염라국(閻羅國)과 비슷한 것이다.

 그 남상(濫觴)의 처음과 복궤()의 마지막을 살펴보면 처음 창건이 성화(成化) 六十 一년 경인에 있었고, 중수는 또 순치(順治)의 경인에 있었으며, 지금의 중건 또한 건륭(乾隆)의 병인에 있어서 세 번의 [8]영집(營葺)이 모두 지지(地支)의 인()년인즉 천도의 순환으로 그 숫자가 서로 맞으니, 어찌 이상한 사실이 아니겠는가.

 장하다! 운곡의 세움이 이미 새로왔고 응진의 그림이 또한 묘하여 일월과 다투는 그 빛이 시내와 골짝을 비추어 빛나니, 성신(星辰)과 운하(雲霞)는 하늘의 문채요 초목과 금수는 땅의 문채이며, 그 문채는 지극한 것은 오직 이 명부전의 정교한 五채()이다. 응진의 그림으로 인하여 운곡의 공을 나타내었으니, 경위가 서로 걸맞고 내외가 서로 응하는 것이다.

 또 학순(鶴淳) 비구는 물건의 많고 적음을 알고 일의 처음과 마지막을 힘썼으니 그 공도 또한 위의 두 사람과 같다. 그러므로 세 사람의 공과 흥폐의 대강을 간단히 적어 기문으로 삼는 것이다.

 

 비음기(碑陰記)

 

 선사(先師) 환성 선사(喚惺禪師)가 세상을 떠나신지 오래 되어 도덕의 근원이 세상에 나타나 수 없으므로 마음에 한이 맺히었었다.

 기묘년 가을에 조그만 비를 세우기 위해 그 문인 궤홍(軌弘)으로 하여금 그 역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신사년 첫 여름에 그는 서울에 올라가 구계 상공(龜溪相公)에게 비명(碑銘)을 청하고 한 달을 머물러 비로소 얻었으니 그 수고가 여간이 아니었다.

 늦여름에 또 표충(表忠)의 책임을 맡아 문정(門庭)에 발표하였더니 그 의논이 여일하였다. 그러나 남방에는 좋은 돌이 없으므로 법손 유일(法孫有一)이 그 가을에 다시 서울에 올라가 백금(百金)을 넘게 주고 돌을 두 개 사서 비명을 새기고는 배에 싣고 돌아오니 임오년 첫 여름이었다.

 소역(小役)은 아무와 아무요, 그것을 발의(發議)한 것은 손자 아무며, 관리는 아무가 하고 목수는 손자 아무로서 마침내 이 일을 이루었으니, 어찌 명명(冥冥)한 속에서도 그러할 줄을 알았던가.

 문인(門人) 아무가 삼가 지음.

 

 괴음정기(槐陰亭記)

 

 ()의 북쪽 모퉁이에 훼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크기는 열 아름이요, 높이는 백 길이며 가지는 백천만억으로서 가지마다 하늘에 닿았고 잎마다 해를 가리웠으며 짙은 그늘은 땅에 가득하고 맑고 시원한 기운을 사람에 쏟으니, 생각컨대 각수(覺樹) 그늘에 보리(菩提)의 신()이 아마 여기 있으리라. [9]향수(香水) 가의 군다니(軍茶尼) 나무가 과연 이처럼 컸겠는가.

 흑양(黑羊=癸未) 여름에 완월(翫月) 법사가 공인(工人)을 시켜 이 정자를 지을때, 채찍을 들고 돌을 몰아 뜰을 만드니 높이가 여러 길이었고, 삼태기를 메고 흙을 져다 채우니 두께가 열 자나 되었다. 여러 길의 높이가 태산보다 높고 열 자의 깊이가 바다보다 깊었다. 왜냐 하면 이것을 관리하는 주인의 그 지혜의 높이가 태산보다 높고 주인의 도량이 바다보다 넓기 때문이니, 이것을 지은 사람도 그와 같아서 산과 바다처럼 높고 깊다.

 또 돈대 밑의 돌을 빼어 흙과 모래를 쳐내고 물을 끌어다 연못을 만드니 맑은 물을 내려다 보면 마치 거울이 얼굴을 비추는 것과 같다.

 옛날에 기구하던 곳이 오늘에 평탄하게 되었으니 묵객(墨客)들은 여기서 시를 짓고 짐꾼들은 여기서 어깨를 쉬나니 사방의 맑은 바람은 땀 난 얼굴의 가을이요, 한 못의 흐르는 물은 타는 마음의 눈이다.

 표표(飄飄)히 어구(御寇)가 바람을 타는 뜻을 내고, 묘묘(渺渺)히 왕교(王喬)가 학을 타는 생각이 많으며, 허리에 十만전()을 찼나니 어찌 양주(楊州)를 부러워하고, 손으로 八만권을 펴나니 서토(西土)를 길이 사모한다. 진실로 선정(仙庭)이라 할 수 있고, 또한 불굴(佛窟)이라 할 수 있으며, 푸른 버들에 황금 꾀꼬리요 흰 돌에 찬 못이니 이것이 이 정자의 기관(奇觀)이다. [10]초택(楚澤)의 산천과 무릉(武陵)의 선경(仙境)도 감히 여기에 비길 수 없으니 티끌 속의 구릉(丘陵)이 뛰어난 경치를 숨겼다는 것이 참으로 진실한 말이다.

 이 완월 주인은 바루 하나로 [11]만종(萬鍾)을 가벼이 여기거니 어찌 구태여 방자한 마음으로야 그렇게 되겠는가. 청익(淸益)을 대하는 여가에 적으나마 그윽한 흥취를 붙여 이 정자를 지은 것이니, 이는 인간 밖의 사람인가!

 

 의해 능엄 중수기(義海楞嚴重修記)

 

 대개 물건의 모이고 흩어짐은 사람의 잘하고 못함에 있는 것이다.

 이 책의 七질()은 옛 사람이 얻어 전보(全寶)를 이룬 것인데 지금은 여러 곳에 흩어져 반보(半寶)가 되었으니 이것을 보는 사람으로서 누가 개탄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내가 다행히 그것을 세 곳에서 얻었으니, 즉 고원읍(高原邑)의 어느 속가(俗家)에서 三권을 얻었고, 함흥 천불산(咸興千佛山)에서 一권을 얻었으며, 북청 대동사(北靑大同寺)에서 三권을 얻어 모두 함께 七부가 되었으니 이것은 반드시 신()이 나를 인도해 지시한 것일 것이다. 기이하고 기이한 것이다.

 건륭(乾隆) 신사년 여름에 중수하고 함을 만들어 가외(可畏)에 전하는 것이니, 후일에 이것을 보는 사람은 갖거든 완전히 가져서 부디 나누어 가지지 말고, 간수하거든 공()으로 간수하여 부디 사사로이 간수하지 말라. 혼자서 홀로 보는 병이 없도록 하는 것이며, 천추에 반보(半寶)의 폐단이 없기를 바라는 것이다.

 

 대방광 원각경소초 중편침재서(大方廣圓覺經疏鈔重編鋟榟序)

 

 대개 원각의 도는 일진법계(一眞法界)로서 이지(理智)가 나누어지지 않은 것이다. 공겁(空刧)의 이전에 은은하여 볼 수 없고 일용(日用)의 사이에 소소(昭昭)하나 잡을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이 영명(靈明)의 소식은 크게는 법계를 싸고 적게는 [12]인허(隣虛)에 들어가는 것으로서 十방 여래의 머무는 정토(淨土)요 일체 중생의 갖춘 바 본심이어늘 문자의 [13]전제(筌蹄)에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그러나 도는 글을 의지해 나타나고 글을 사람으로서 말미암아 전해지는 것이니 또 어찌 쓰고 출판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그렇다면 먼지 앉은 거울을 갈아 [14]二집()을 제거하고, 마니(摩尼)를 걸어 十방을 비춤으로써 부처 경계에 이르려는 자로서 어찌 감히 이것을 도외시하여 무궁한 세상에 전하지 아니 하겠는가.

 아아 판본(板本)이 오래 되어 자획이 이즈러졌으며, 또 경소(經疏)에 있어서는 그 글자가 너무 크고 초문(鈔文)에 있어서는 글자가 너무 작았다. 그래서 나는 미련함을 헤아리지 않고, 굳이 다시 엮고 고쳐 쓸 뜻을 내어 영남의 용천사(龍泉寺)에서 시작하니 갑술년 가을이었고, 관동의 건봉사(乾鳳寺)에서 마치니 기묘년 봄이었다. 그리하여 六년 동안을 부지런히 애쓰면서 一념이 한결같아 다행히 원을 이루게 된 것이다.

 대게 옛 것을 상고하여 새 것을 이룰 때에는 글자 수의 더하고 덜함이 없을 수 없고, 과목을 따라 소()를 모을 때에도 또한 문세(文勢)의 이합(離合)이 있는 것이니, 오직 통달한 사람이 시교(試校)할 때에 꾸지람이 없기 바랄 뿐이다.

 청구(靑丘)의 사위(舍衛)에서 시주를 널리 모집하고는 글자를 베끼는 사람의 붓을 빌어 쓰고 글씨를 교정하는 사람의 칼을 빌어 새겨서 후세에 전하는 사람은 그 오직 완월 궤홍(玩月軌弘)법사 뿐인가. 만우 익붕 장로(萬愚翼鵬長老)와 영파(影波) 대사는 시주를 모집하고 재물을 모아 이 역사의 시종을 맡았으니 그 공도 또한 크다 할 것이다. 비록 거듭 엮은 공이 있으나 쓰고 새기는 힘이 아니면 어떻게 각도(覺道)의 바퀴가 돌아갈 수 있겠는가. 거의 겁석(刧石)과 함께 장구할 것이다.

 내가 만일 그 공을 적어 책 머리에 붙이지 않는다면 후일의 참고 거리가 없겠기 때문에 감히 난잡한 말로 삼가 서문을 쓰는 것이다.

 

 신편소 금강경 서(新篇疏金剛經序)

 

 경전에

 「모든 성현은 다 무위법(無爲法)으로 차별을 둔다」

하였다. 무위이면 인과(因果)와 범성(凡聖)이 없고, 차별이면 인과와 염정(染淨)이 역연하다. 그리고 게송에는

 「일체의 위()를 성취하고 갖가지 의심을 끊는다」

하였다.

 무착(無着)은 일체의 위()에 의거하여 三지()와 五위()를 열었으니 즉 무위 가운데의 차별의 뜻이요, 천친(天親)은 갖가지 의심에 의거하여 二十七단()을 끊었으니 이것은 차별 가운데의 무위법을 나타낸 것이다. 이 두 보살은 각각 一변()에 의거하여 중도(中道)를 나타내어 바로 여여(如如)하여 움직이지 않는 자리에 이른 것이니, 경전 가운데의 뜻으로서 여기서 벗어난 것이 없는 것이다.

 또 오가해(五家解) 가운데 종경(宗鏡)은 석화 전광(石火電光)의 뜻을 펴고 은산 철벽(銀山鐵壁)의 기틀을 나타내어, 기용(機用)을 마음대로 나타내고 강요(綱要)를 끌어 칭송하였으며, 도천(道川)은 최초에 자리를 펴고 최후에 문을 잠가 경의 뜻을 반복하여 그 묘함을 찬송하였으며, 육조(六祖)는 용심(用心)을 잡아 해석하고, 쌍림(雙林)은 三성()을 잡아 송()하였으니 이상 四가()의 성질은 실()을 칭송하고 드날려, 사람들로 하여금 붙음을 풀고 결박을 버리게만 하고 그 관맥(貫脈)과 대절(大節)은 논()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직 규산(圭山) 대사만은 논석(論釋)을 깊이 알고 경의 뜻을 관통하여 관조(觀照)의 지혜와 실상(實相)의 이치가 마음의 눈에 환히 나타나게 하였다.

 그런데 지금 학자들은 五가해에 막히어, 기이한 말과 묘한 글귀로써 그 구학(口學)만을 익히면서 그 전부의 종지(宗旨)에는 어두어서 그 비밀한 뜻과 깊은 취지에서 심학(心學)을 빠뜨리니, 이것은 실로 큰 병폐이다.

 그래서 임신년 봄에 나는 초당(草堂)의 소()로 경문 밑에 주석을 붙쳤다. 소의 글은 지극히 간단하고 경의 뜻은 아주 알기 쉬우며, 주의(住義)의 계차(階差)와 단의(斷疑)의 혈맥이 마치 구슬이 밤을 비추는 것 같고 해를 하늘에 건 것 같았다.

 또 말하고 들을 때에 그 주의(住義)를 잊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에 주명(住名)을 경문 사이에 표해 써 두고 출판하고 펴서 후배를 유익하게 하는 것이지마는, 다만 모르는 자는 삼()을 지고서 나를 반드시 비방할 것이다. 때에 독실하고 빈 터에 걸리는 이에게야 어찌 여름에 얼음을 말할 수 있겠는가? 뒤에 오는 사람으로서 나를 알고 나를 꾸짖음이 다만 이 점에 있을 것이다.

 

 중간 금강경소기 서(重刊金剛經疏記序)

 

 위대하여라, 이 한 권의 경이 어디로부터 나왔는가. 수미산 꼭대기이냐? 대해의 물결 속인가? 왕사성(王舍城)의 한 바퀴 달이 냉냉히 길이 비추나니 이것은 바로 여러 분의 맨 살덩이 속의 참 면목이니라.

 생각하면 우리 석존(釋尊)께서 二十 一년 동안 이 경을 말씀하신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영광(靈光)이 홀로 빛나 밝고 밝아 어둡지 않은 그 하나를 깨치게 하기 위해서인데, 그런데도 다리 밑에 三척의 깊은 진흙을 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강희(康熙) 신유년 가을에 천함 만축(千函萬軸)을 실은 배가 어디서부터 왔는지 떠 와서 호남의 임자도(荏子島)에 이르렀는데 병인년 봄에 이르러 백암 화상(栢庵和尙)이이 전보(全寶)를 얻어 판에 새기니 바로 인천(人天)의 눈이 되었었다.

 그러나 세월이 쌓이고 판각의 글자가 희미해져서 학자들이 큰 병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건륭(乾隆) 경오년에 내가 다시 새기려는 원을 내어 여러 곳으로 두루 돌아다닐 때, 마음에 새기고 손에 가진지 지금까지 三년이다. 이제 다행히 그 문하(門下)의 十여인이 다 함께 서원을 세우고는 정성을 다하고 재물을 모아 출판하고 펴내어 백암의 자취를 계승하니 이른바 여우 가죽을 모아 갓옷(=皮衣)을 만들고 모든 냇물을 끌어 바다를 이루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또 모르겠다. 몇 백년 뒤에 내 자취를 이어 무궁에 전할 사람은 그 누구인고? 만일 후학(後學)으로서 진실로 규산(圭山)의 소()와 장수(長水)의 기()로서 경 속의 깊은 뜻을 찾아낼 수 있다면, 관지(觀智)가 밝아지고 실상(實相)이 나타나, 마니(摩尼)를 씻고 이 한 권을 부앙(俯仰)하고 시청(視聽)하는 사이에 꿰뚫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빛깔마다 소리마다 다 반야(般若)의 묘용(妙用)이 되고, 아침에 핀 꽃과 서리 맞은 잎사귀가 그 면전에 빛날 것이다.

 그 때는 여래의 말씀한 경전과 밀선(密璿)의 소기()도 도리어 허공을 쪼개어 두 조각을 내는 것이 되고, 지금 새기는 이것도 또한 [15]불에 데인 자리에 쑥심지를 붙이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니 여러분은 과연 알겠는가?

 

 중간 기신론필삭기 서(重刊起信論筆削記序)

 

공씨(孔氏)가 춘추(春秋)를 지으매 난신 적자(亂臣賊子)가다 두려워했고 공승(功勝)이 기신론(起信論)을 지으매 단상(斷常)의 二집()이 저절로 깨어졌다. 세상으로 하여금 [16]포폄(褒貶)과 상벌(賞罰)의 조목을 알아 군자의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은 곧 공씨의 춘추요, 사람으로 하여금 중도 실상(中道實相)의 이치를 깨달아 성현의 지경에 이르게 하여 만고에 멸하지 않는 것은 오직 공승의 기신론이다.

 현수(賢首)의 소()와 장수(長水)의 기()는 또 무엇하러 지었던가. 대개 기로써 소를 통하고 소로써 논()을 해석하며 논으로써 경의 깊은 뜻을 밝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은 논을 의식해 밝아지고 논은 소로 말미암아 통해지며 소는 기를 얻어 나타나는 것이니, 깃과 날개가 되어 밝음을 내는데 섶을 꺾고 촛불을 잡아 관찰하는 것은 오직 장수의 기 뿐이다.

 이 기가 동방에 오기 전에는 동방의 학자들로서 논소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그 [17]반착(盤錯)의 베기 어려움과 [18]유인(游刃)이 넓지 못함을 병으로 여겼었다. 그런데 얼마나 다행한가. 강희(康熙) 신유년에 각해(覺海)에 종풍(宗風)이 불어 인자한 배가 정박하게 되어, 장수의 기가 근화(槿花)의 나라에 번지게 되었으니 이것은 소 밖의 별행(別行)인 것이다. 그리하여 백암 노장이 이 기를 소 밑에 붙이고는 출판하고 펴내어 후학들의 눈을 열어 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러나 글자가 잘고 글줄이 쏘물며, 해가 오래 되고 판각이 이지러져 장구하기 어렵기 때문에 완월 홍(翫月泓), 풍악 인(楓岳仁), 허명 주(虛明珠), 환우 윤(幻宇胤), 남명 붕(南溟鵬), 성암 윤(聖岩允), 취송 혜(翠松惠), 용성 해(龍城海), 적주 선(赤州禪), 취운 안(翠雲岸), 여러 스님네가 재물을 모으고 공인(工人)을 불러 별행(別行)의 당본(唐本)을 구하여 급급히 간행하되 전하는 사람이 널리 펴지 않을까 두려워하니 그 법을 두호하고 사람을 이롭게 하려는 마음이 은근하고 또 간절한 것이다. 노선(老禪)도 다행히 이 역사를 맡아 [19]환해(寰海)에 널리 퍼져 미몽(迷夢)을 깨우치기를 바라나니 그 공도 진실로 큰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이 기로 말미암아 논소의 뜻을 통달하여 중도 실상(中道實相)에 깨쳐 들어가는 이가 있다면 이것이 어찌 [20]어토(魚兎)의 활계(活計)만을 향한다면 오히려 나귀 태와 말 배 속에 들어감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말해 보라. 어떤 것을 어토라 하며 어떤 것을 나귀 태와 말 배라 하는가. 부디 여러 분은 잘못 행동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선문오종강요 서(禪門五宗綱要序)

 

 대개 가지로서 근본이 없는 가지가 없고, 갈래로서 근원이 없는 갈래가 없는 것이다. 한 법이 갈라져 양종(兩宗)이 되고, 양종이 또한 五파()가 되었으니 그 가지와 갈래에 근본과 근원이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대각 세존(大覺世尊)께서 다자탑(多子塔) 앞에서 반 자리를 나누어 주었으니 이것이 제一처() 전심(傳心)으로서 살인검(殺人劒)이다.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니, 이것이 제二처 전심으로서 활인도(活人刀)이다.

 사라쌍수(沙羅雙樹) 사이의 관()에서 두 발을 보이시니, 이것이 제三처 전심으로서 살활동시(殺活同時)인 것이다.

 이런 소식을 가섭(迦葉)으로부터 한 사람씩 전해 내려와 조계(曹溪)에 이르고, 조계 밑에 두 사람이 있으니, 첫째는 남악 회양(南岳懷讓)인데 그 활()을 숭상하여 잡화포(雜貨舖)를 연 것이다. 둘째는 청원 행사(淸源行思)인데 그 살()을 숭상하여 진금포(眞金舖)를 열었으니, 이것이 곧 한 법이 살활(殺活) 양종으로 갈라진 것이다.

 청원 밑에서 三종이 나왔으니 그것은 조동(曺洞)이요, 운문(雲門), 법안(法眼)이요, 남악 밑에서 二종이 나왔으니 이른바 임제(臨濟), 위앙(潙仰) 등이니, 이것이 곧 양종이 갈라져 五파로 된 것이다. 五파 사람들은 다 무() 가운데서 묘한 가락을 불어 내고는 소리를 고치고 가락을 바꾸어 이름과 모양이 자못 많은데, 그것들은 대부분 여러 책에 흩어져 있기 때문에 학자들이 그 깊은 이치를 엿보지 못하여 병으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환성(喚惺) 화상이 여러 책 가운데서 요긴한 이치를 모아 五종강요라 하였다. 나는 그것을 출판하여 불후(不朽)의 물건으로 만들려 하여, 그 잘못된 것을 바루고 그 빠진 것을 보완하되, 운문의 三구()에 대해서는 청산(靑山) 늙은이의 해석을 인용하고, 조동의 五위()에 대해서는 형계() 스님의 주석을 인용하여, 그 뜻을 통하게 하고, 그 욧점을 나타내는 등, 모두 과거 현인의 저술에 의한 것으로서 조금도 사사로운 소견을 붙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스승의 지위에 있어서 총채 자루를 잡는 이는 이것을 두고 따로이 종풍(宗風)을 변험(辨驗)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뛰어난 이가 있어서 그 본원(本源)에 투철하면 이런 갈등(葛藤)에는 발붙일 곳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앞 사람의 편집과 지금의 이 출판은 까마귀 대가리에 참새를 기르는 것이니 그 나무람을 들을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간 도서법집과해 서(刊都序法集科解序)

 

 향상(向上)의 한 길은 천성(千聖)도 전하지 못한 것으로서, 명상(名相)을 뛰어나고 문자를 떠난 것이어니 무슨 주각(注脚)이 있을 것인가. [21]설봉(雪峰)의 목구(木毬)[22]귀종(歸宗)의 예마(曳磨)는 다 사람에게 보이고 세상을 이롭게 하려고 향상을 희롱하는 궤측(軌則)이다.

 그러나 그 근성이 다름을 어찌하겠는가. 그러므로 규산(圭山)[23]타니(拖泥)를 면하지 못하여 제가(諸家)의 언구(言句)를 모아 사람들로 하여금 三종()을 희롱하여 一심()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니 그것을 이름하여 선원집(禪源集)이라 하고, 또 여실(如實)한 언교(言敎)를 기록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돈점(頓漸)을 구별하고 영지(靈知)를 취하게 하였으니 그것을 이름하여 별행록(別行錄)이라 하였다.

 명상에 끄달리고 문자에 걸리면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그 뜻을 다 알 수 없거늘, 하물며 우둔한 자로서야 어찌 그 근원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뱀을 마시어 결정하지 못하고 평초를 먹고 다툼이 있는 것이다.

 화엄종(華嚴宗)의 회암(晦庵) 장로가 개탄하되, 「안팎의 모든 책을 해석한 글이 모두 다 있지마는 오직 위로 두 책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유인(游刃)하고 해석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마침 청()나라의 네 [24]용집(龍集)인 병오년 봄에 금강산에 머물다가 학도들의 청에 의하여 그들을 가르고 그 뜻을 해석하되, 선원집의 뜻을 二량()으로 세우고 별행록의 취지를 二현()으로 정하였는데 묘함은 고금을 뛰어나고 지혜는 여러 사람을 벗어났으니 후학의 지남(指南)이 될 만하였다. 섶을 쪼개는 도끼가 있고 밤을 비추는 구슬이 있으니 어찌 다만 그 때 一문()의 보배만으로 그치겠는가. 실로 우내(宇內)의 공통된 보배이었다.

 문인(門人) 우암(雨岩)이 풍곡 활공(豊谷闊公)과 함께 출판하기를 꾀하여 온 나라에 공개해서 선사의 뜻을 이룬 것이다. 아아, 덕이 있으면 반드시 말이 있는 것이다.

 대개 이 과해(科解)의 저술은 잡화(雜華)를 숭상하고 선관(禪觀)을 힘쓰는 여가에서 나온 것이다. 그 말한 언구(言句)가 저 목구(木毬)와 예마(曳磨)의 소식을 떠나지 않았으니, 실로 향상(向上)의 전지(田地)를 밟았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을 새겨 이 세상에 길이 전해야 할 것이다.

 

 능엄의해초집 서(楞嚴義海抄集序)

 

 ()의 장수 자선(長水子璿) 스님이 七대과(大科)를 세우고 능엄경(楞嚴經)의 대요를 묶어 그 뜻을 소()하고 책 이름을 의소()라 하였다.

 늑담 월(泐潭月) 스님이 그 글과 뜻이 너무 복잡함을 보고 이에 그 요의를 추려 이름을 표지월(標指月)이라 하니 그 또한 장수를 본받은 것이다. 그 표지월은 의소를 근본으로 하여 지은 것이므로, 비록 그 이름은 다르나 그 말의 뜻은 실로 다를 수 없는 것이요 다만 광약(廣略)이 조금 다를 뿐이다.

 정각 법사 악공(淨覺法師岳公)이 여러 소()를 두루 보고는 다시 필삭(筆削)하여 집해(集解)라 하고, 집해 가운데서 혹 허술한 곳이 있으면 사사로 조석(助釋)의 글을 두어 복잡하고 간략함이 묘함을 ?타내니 그것을 사기(私記)라 하였다.

 민중(閔中) 함휘 선사(咸輝禪師)가 그 여러 해석을 보고 모두 정금 미옥(精金美玉)이며 함께 큰 도리를 찬성한 것이라 하여 三十권으로 모아 만들고, 여러 소를 모아 큰 바다로 돌렸기 때문에 그것을 일러 의해(義海)라 하니, 만일 과거의 원력이 없었더라면 어찌 이처럼 될 수 있었겠는가. 화엄(華嚴)의 주산신(主山神)이 얻은 법문의 이름을 출현무변대의해(出現無邊大義海)라 한 것이 이것인가 한다.

 지금 나는 온능해(溫凌解)로 전강(傳講)하는 여가에 이 「의해(義海)」를 얻어 두 번 절하고 완미(翫味)한즉 자못 정묘롭고 간절하여 후학을 위해 깨우치는 바가 많았다. 그러나 여러 해석의 장구(章句)가 너무 호박(浩博)하여 기억하기 어려웠다. 그러므로 졸렬함을 헤아리지 않고 그 요지를 뽑아 써서 뒤의 사람들에게 공개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우리 동방에서 숭상하는 것은 [25]환해(環海) 만한 것이 없는데, 왜 남의 해석의 덧붙이기로 그 사이에 넣어 다시 그 근본을 어둡게 하는가?

하였다. 그래서 나는

 「난초는 꼭 촉택(楚澤)에서만 캐야 하고 옥은 반드시 형산(荊山)에서만 구해야 하는가? 대개 문리만 꼭 맞는다면 그를 좇는 것이 옳거늘 어찌 숭상하고 숭상하지 않음으로 옳고 그르다 하겠는가?

하였다. 바라건대 식자들은 꾸짓지 말라.

 

 시왕전 향공양 서(十王殿香供養序)

 

 가만히 생각하건대 한 기운 이전에는 본래 시비(是非)의 이름이 없었고 三재()가 생긴 뒤에 비로소 선악의 현상이 있어서 만류(萬類)는 구름처럼 일고 一진()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러므로 九천() 위에는 선을 상주고 악을 벌 주는 조목이 있고 十지()의 밑에는 윤회응보(輪廻應報)의 법이 열렸다. 그러하거늘 소소(昭昭)한 염라(閻羅)의 업경(業鏡)과 중중(重重)한 천제(天帝)의 망주(網珠)를 누가 피할 수 있으며 누가 속일 수 있겠는가.

 ()과 악은 경주(鏡珠) 속에 스스로 나타나고 경중(輕重)과 연치(?)는 형감(衡鑑) 위에서 도망하기 어려운 것이니 어찌 억지로 되겠는가. 저절로 된 것이다. 참으로 천지 사이에 고금을 다하고 만겁에 걸쳐 지극히 공평하여 사()가 없는 도이다.

 지금 사순 상인(思順上人)이 시주를 모집하고 향공(香供)을 마련하여 염라전(閻羅殿)에 올림으로써 끊이지 않는 법을 도모하였으니, 이 사람의 정성은 천지를 감동시키는 것이니, 선악의 인과에 반드시 용서가 있을 것이다.

 

 우용 처일 대사(寓庸處一大師)에게 주는 서문

 

 관동(關東)의 보개산(寶盖山)에 큰 법사가 있으니 그 호는 청하(靑霞). 생각하면 내게 아저씨요 또한 대사의 스승이다. 한 가지의 잎이 남북으로 피었으니 나뉘어 천리 밖에서 그 얼굴도 모르고 그 이름도 몰랐었다. 하늘이 이 땅으로 하여금 다행히 이 모임을 열게 하였으니, 그 침개(針芥)의 바른 인()을 알겠거늘 하물며 광명장(光明藏)을 대해 내게 이익을 청함이겠는가.

 들으면 지행(智行)이 있는 사람은 체용(體用)의 법을 배워, 진경(塵鏡)을 二집() 가운데서 갈고 마니(摩尼)를 十방 안에 비추며, 근진식대(根塵識大)로 청정한 문을 열고 인과도품(因果道品)으로 장엄한 길을 얻으며, 三혹()을 이미 분별하고 또 윤회를 끊는다고 한다.

 어느 날 대사가 내게 감사하기를

 「보지 모한 얼굴을 보고 듣지 못한 법을 들으니, 그 공도 깊거니와 또한 이런 큰 다행이 없다.

하였다.

 대사는 또 내게 호를 청하기에 나는 우용(寓庸)이라  지어 주었다. 어째서 우용이라 했는가? 대게 망홀무위(無爲)의 사이에 살면서 만물유성(萬物有成)의 작용이  한결같기 때문이다.

 또 일파문의(一派門誼)의 정을 느끼어 게송 한 편을 읊어 붙인다.

 

 이명 상인(以明上人)의 시에 주는 서문

 

 나는 북명(北溟)의 나그네로 한 번 지팡이를 남방으로 날린지 어느덧 六년이 되었지마는 아직 남과 허교(許交)한 일이 없이 매양 동천(洞天)을 향해 길게 한숨할 뿐이었다.

 흑호(黑虎=任寅) 봄에 명양(鳴陽)의 서석(瑞石)에 잠깐 머물러 있는데, 어느 날 스님이 천사(泉寺)로부터 표연히 거기 왔었다. 그 고명(高明)한 위의는 홀로 사람들에게 뛰어났었다. 내 마음은 물과 같고 스님 뜻은 달과 같아서 소용(踈慵)과 고명(高明)은 마치 달이 물에 비춤과 같다는 것이 참으로 진실이다.

 아아, 흐르면 물은 돌아 오기 어렵고 달은 그믐이 되면 이지러지기 쉬운 것이다. 달과 물이 그믐 되고 흐르는 것은 이치가 그런 것이다. 끝까지 고이어 흐르지 않으면 진실로 청탁(淸濁)의 공을 나타내지 못하고, 끝까지 밝아 그믐 되지 않으면 그 또한 주야(晝夜)의 도를 가를 수 없는 것이니, 지금의 이별도 그 이치 또한 그런 것이다. 모이고 흩어짐은 물이 막히고 트이는 것과 같고 달이 밝고 그믐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니, 그믐 되었다가 다시 밝고 트이었다가 다시 막힌다면 그것은 이별했다가 다시 만날 것임을 나는 믿는 것이다.

 스님은 이것을 마음에 새겨 천리 밖에서 나를 생각한다면 나 또한 남방의 달이 북천(朔天)을 비춤을 바라볼 것이다.

 

 스님을 향산(香山)으로 보내는 서문

 

 일찍 듣건대 묘향산은 향상(香象) 보살이 거주하는 곳으로서 그 보살이 二천 권속을 데리고 항상 거기 거주하면서 무진장(無盡藏)의 법문을 연설한다고 한다. 우리 스님은 여기서 자랐고 또 여기로 돌아가나니 그 무리의 하나가 아니겠는가.

 우리 동방 산수의 절경으로 이보다 나은 곳이 없다. 만 길 높은 봉우리의 구름 빛은 호호(浩浩)하고 천 길 옛 시내의 물소리는 냉냉하다. 이 아양(峨洋)한 아름다운 경치는 마치 좋은 그림과 같아서 사람의 맑은 생각을 이끌어 낸다.

 우리 스님이 저기로 돌아가는 뜻을 나는 안다. 우리 스님의 뜻은 도에 있고 그 경치에 있지 않다. 그리하여 그 산의 빛깔과 물의 소리에 듯을 붙일 뿐이다.

 대게 도에 들어가려면 보고 듣는 것보다 첫째감이 없다. 이제 그 빛깔은 사람의 보는 바를 바르게 하고 소리는 사람의 듣는 바를 일으키는 것이니, 만일 그 봄에 나아가 묘함을 밝히고, 그 들음에 나아가 단박 깨달으려면, 그것은 언어나 문자에 있지 않고 홀로 우뚝히 교외(敎外)에 전하는 종()을 얻어야 하는 것이니, 응당 우리 스님의 마음은 실로 이런 것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즐겨 헛되이 짚신만 밟겠는가.

 나아가서는 신선을 사모하여 장생술(長生術)을 배우는 선비와 스승을 찾아 패경(貝經)을 강하는 무리로서 이 산수에 다달아, 사물을 보고 도를 참구하려는 이는 사물을 보면 호기(浩氣)를 타고 맑은 바람에 목욕하면서 도연(陶然)히 만물이 생기기 전에 있는 것 같을 것이요, 도를 참구하면 실상(實相)을 깨치고 큰 법을 깨달아 창연(暢然)에 들어간 것 같을 것이다.

 더구나 우리 스님은 보고 들음에 나아가 마음을 밝히고 도에 들어갈 것이니 어찌 항상 보살의 권속이 아니겠는가. 나도 또한 묘향에 놀고 싶은 생각이 있기 때문에 그의 출발에 다달아 이 글을 주는 것이다.

 

 음풍 영월(吟風咏月)을 꾸짖는 글

 

 아아, 지금 스님의 나이는 七十 고개에 이르렀읍니다. 그래서 기한은 상유(?)에 촉박하고 목숨은 비곡(悲谷)에 다달았으니, 힘써야 할 이치에는 힘쓰지 않고 힘쓰지 않을 일에 힘쓰는 것은 부디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시로써 매공자(梅公子)를 읊는 것은 일없는 사람의 힘쓸 일이요, 사립문을 닫은 도납(道衲)이나 구름을 짝하는 고선(高禪)의 힘쓸 바가 아닙니다.

 그런데 시는 선()과 같은 것으로서 선은 오입(悟入)에 있고 시는 신해(神解)가 귀한 것입니다. 지금의 납자(衲子)들로서 능히 오입하고 능히 신해한다면 시도 힘쓸 수 있겠지마는 그렇지 않다면 무엇하러 시를 쓰겠읍니까?
 
생각하면 스님은 옛날 염불가(念佛歌)를 지어 염불하는 사람들에게 펴서 그것을 권하였으니 이 공문(空門)에서 염불하는 참 도인인가 하였읍니다. 그런데 지금은 풍전한(風顚漢)이 되어, 강상(江上)의 맑은 바람과 산간(山間)의 밝은 달에 취해 부질없이 정신을 괴롭히지만 그것은 도에는 아무 보탬이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또 관동(關東), 관서, 관북 등 세 곳에서 읊은 시편들은 다 실()을 버리고 화()로 나아갔으니, 허공 속에 꽃을 심는 것으로서, 내가 말하는 파범부(破凡夫)의 조취(
)하는 자입니다.

 시는 성정(性情)을 근본으로 하고 도는 몸과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만일 오입하고 신해하면 시도 옳고 도도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맑히는 묘한 글귀를 세상에 펼치는 것은 빈 산 밝은 달과 연루(蓮漏)가 모두 고요한 속에서 한가히 앉아 염불하는 한 소리의 즐거움보다 못한 것입니다.

 애석하고 애석합니다. 그 시편을 빌어 보고 드디어 패궐(貝闕)을 써서 전하게 됩니다.

 

 환성 선사(喚惺禪師)를 제사하는 글

 

 대조계종 환성당 선사 각령(大曹溪宗喚惺堂先師覺靈)께 드리나이다.

 엎드려 생각하오면 제자 등은 가까이 병석(甁錫)을 모시면서 친히 가르침을 입사와 그 은혜와 덕은 산과 바다로도 그 높이와 깊이를 다 말할 수 없사오니, 너무나 큰 그 은혜를 갚을 길이 없사옵니다.

 신미년에 선사께서 참선하는 여가에 읊으신 시집 한 권과 또 지으신 선문강요(禪門綱要) 한 권을 판각하여 세상에 공포하고 기묘년 이래로 비석을 세우려는 깊은 원으로 한 조각 성심만은 돌이 아니라서 굴르지 않았었읍니다.

 법손 궤홍(法孫軌泓)이 서울에 올라가 진신(縉紳)의 대가(大家)에 비명(碑銘)을 청하고 서울서 비석을 사기로 하였고, 법손 유일(有一)이 거기 가서 새기는 일을 감독하고 비석을 배에 싣고 남방으로 돌아와 대둔사(大芚寺) 기슭에 비를 세웠읍니다.

 아아, 선사의 도가 어둠 속에서 해처럼 솟아나니, 八해()가 함께 듣고 만구(萬口)가 같이 칭송하니 그 덕이 얼마나 큰 것입니까. 오늘에 이르러 이처럼 성취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반드시 하늘과 신이 도운 것일 것입니다. 문인(門人) 등은 이 뒷날 선사님을 연화계(蓮花界)에서 모시게 되더라도 반드시 부끄러움이 없을 것입니다.

 이승 저승이 다르다 하더라도 마음으로 비추거니 어찌 그 간격이 있겠읍니까. 삼가 一주()의 명향(茗香)과 한 잔의 맑은 차로, 각령(覺靈) 앞에 절하고 드립니다. 엎드려 바라옵나니 이 가엾은 정성을 살피시어 이르러 받아 주시옵소서.



[1], 반수 ·· 중국 고대의 황제(黃帝) 당시의 유명한 장인(匠人).

[2], 복궤() ·· 조그만 일을 쌓아 큰 일을 이룸을 비유한 말.

[3], 운구(雲衢) ·· 구름이 오가는 길. 하늘.

[4], 여와(女媧) ·· 상고(上古)때 제왕의 이름. 복희(伏羲)씨의 누이동생. 五색의 돌을 다듬어 하늘을 보()하고 자라의 다리를 잘라 四극()을 보하고, 갈대의 재를 쌓아 도수(滔水)를 막았다 함.

[5], 상산(商山) ·· 한 고조(高祖), 난세(亂世)를 피한 四호()가 살던 산.

[6], 부춘(富春)은 한의 엄광(嚴光)이 밭을 경작한 엄능산(嚴陵山) 앞을 흐르는 강의 이름. 강가에 엄능이란 여울이 있고 낚시터로 유명함.

[7], 쌍오(雙五) ·· 돈의 이름.

[8], 영집(營葺) ·· 영집(營緝). 경영하고 수선하는 것.

[9], 향수(香水) ·· 향수해(香水海). 여덟 가지 공덕의 물로 가득찬 바다. 수미산의 주위를 감돌고 있다 함.

[10], 초택(楚澤) ·· 초()나라의 소택(沼澤).

[11], 만종(萬鍾) ·· 만종록(萬鍾祿). 아주 많은 봉급.

[12], 인허(隣虛) ·· 색법(色法)의 극미(極微). 즉 물질을 가장 작게 나눈 것.

[13], 전제(筌蹄) ·· 전()은 물고기를 잡는 통발. ()는 토끼를 잡는 덫.

[14], 이집(二執) ·· 단()과 상()의 집착. 단은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다고 하는 장. 상은 모든 것은 영원불변하여 창생하다는 주장.

[15], 뜸을 뜬 자리에 다시 쑥뜸을 하면, 아픔 에 위을 더한다.

[16], 포폄(褒貶) ·· 칭찬과 꾸중.

[17], 반착(盤錯) ·· 여러 가지가 뒤섞임.

[18], 유인(游刃) ·· 고기 잡을 때 쓰는 칼을 쓰는 것. 여기서는 「游刃有余地」가 넉넉하지 못함을 뜻함. 즉 「일에 당하여 종용(從容)하여 여유가 있는 것」이 없음을 탄한 것임.

[19], 환해(寰海) ·· 천하(天下). 세계.

[20], 어토(魚兎)의 활계(活計) ·· 물고기가 통발에 걸리고 토끼가 덫에 걸렸을 때 그들이 살아 나는 계책. 그러나 변하여 경교(經敎)의 뜻과 이치를 비유함.

[21], 설봉(雪峰)의 목구(木毬) ··  설봉이 상당(上堂)하여 설법을 할 때 어느 중의 설봉의 「盡大地是箇解脫門 把手曳伊入」한 것에 대해 한 말을 뒤에 현사(玄沙)가 설봉이 「三箇木毬」를 가지고 놓았다 한 상당인연(上堂因緣)을 말함.

[22], 귀종(歸宗)의 예아(曳麽) ·· 유나(維那)가 운력을 할 때 멧돌을 돌리고 있는데 귀종이 유나에게 「不得動着中心樹子」라고 하였다.

[23], 타니(拖泥) ·· 타니대수(拖泥帶水). 타니는 진흙을 끌어들이는 것. 대수는 물을 뒤집어 쓰는 것. 즉 흙탕물을 뒤집어 쓰는 것. 선가(禪家)에서는 이것이다 저것이다 말을 내세우는 것을 배척하는 뜻으로 이 말을 씀.

[24], 용집(龍集) ·· 용()은 별의 이름. 목성(木星) 즉 태세(太歲)를 말함. ()은 숙(宿). 이별은 一년에 한 번 하늘을 옮겨 가므로 一년을 용집이라 함. 네 용집(四龍集)은 四년.

[25], 환해(環海) ·· 능엄경에 대한 주석서.

 

 

...

천경집 중권.docx
0.07MB

'한글대장경 제82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천경집 행 적(行蹟)  (0) 2026.03.03
천경집(天鏡集) 하 권  (0) 2026.03.03
천경집(天鏡集) 상 권  (0) 2026.03.01
천경집(天鏡集) 서문  (0) 2026.02.27
무용당집(無用堂集) 하권  (0) 2026.02.27